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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9. 2020

산뜻하고 묵직한 코미디

<해치지않아> 손재곤 2019

 대형 로펌의 수습 변호사 강태수(안재홍)는 황대표(박혁권)의 눈에 띄기 위해 노력한다. 황대표는 그런 태수에게 로펌이 전권을 위임받은 동물원 ‘동산 파크’를 되살린다면 그를 로펌 M&A 팀에 합류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얼떨결에 동산파크의 원장이 된 태수. 하지만 기존 동물원장인 서원장(박영규)을 비롯해 수의사 한소원(강소라), 사육사 김혜경(전여빈)과 김건욱(김성오)은 그를 믿지 못한다. 빚 때문에 동물원의 주요 동물들은 모두 팔려가고, 남은 것은 정형행동을 보이는 북극곰 ‘까만코’와 미어캣이나 앵무새 같은 작은 동물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태수는 직원들이 동물탈을 쓰고 방사장 안에 들어가면 관객들이 속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연히 떠올리게 된다. 

 <해치지않아>는 <달콤, 살벌한 연인>과 <이층의 악당>을 연출했던 손재곤 감독의 10년만의 신작이다. 전작들의 주인공은 살인자와 사기꾼이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 태수는 변호사이다. 하지만 그는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 일종의 사기극을 벌인다. 그 논리가 상당히 흥미롭다. 태수는 동물탈이라는 수단을 의심하는 직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한 영상을 보여준다. 고릴라 탈을 쓴 사람이 동물원 안을 돌아다니면 관객들은 모두 그를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찾는 관객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동물의 모습을 보기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물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고 학습된, 일종의 상상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야생의 동물들처럼 활발하지도 않고, 도리어 좁은 공간에서 관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정형행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해치지않아>의 직원들이 탈을 쓰고 연기하는 북극곰, 나무늘보, 기린, 고릴라, 사자는 관객들의 상상을 만족시켜준다. 동물원을 찾은 황대표는 실제로 나무늘보를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동물원을 찾는 거의 모든 관객은 야생의 북극곰이나 사자를 본 적이 없다. 동물원은 동물을 전시하는 곳이지만, 여기서의 ‘동물’은 일종의 상상이다. <해치지않아>가 제시하는 상황은 이를 자연스럽게 지적한다. 동물을 재화로 바라보던 초기의 태수는 해답을 찾지 못하지만, 동물이 상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태수는 대안을 찾아낸다. 

 손재곤의 코미디 감각은 이 상황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다소 뻔하고 지루하게 진행되던 초반부는 태수가 동물원에 도착하면서부터 반전된다. 태수가 동산파크의 직원들과 만나고, 동물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부터 코미디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그 리듬이 이야기나 주제와 분리되어 발생하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상황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손재곤의 코미디 감각은 여전히 탁월하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애인이 살인마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시작되는 코미디나, <이층의 악당>에서 두 주인공의 반대되는 상황이 기묘하게 얽히며 시작되는 리듬, 혹은 단편 <너무 많이 본 사나이>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상황 설정 등이 <해치지않아>에서도 발견된다. 안재홍을 필두로 한 배우들의 연기가 여기에 힘을 실어준다. 박영규는 언제나 잘 해온 것을 다시 한번 선보이고, 강소라와 김성오는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 전여빈의 나무늘보는 화면에 등장하기만 해도 웃음을 유발한다. 특별 출연한 한예리는 해보고 싶었던 연기를 마음껏 선보이며 박혁권의 황대표와 함께 다소 분절된 동산파크 밖의 이야기들을 이어준다.

 다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감에 비해 무난하고 관성적인 결론을 내리는 엔딩은 아쉽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명랑함이나, <이층의 악당>의 고단함 같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는 점도 있다. 동물원의 문제가 동물원 밖 로펌과 대기업의 사정과 얽히면서 유사한 문제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점이 희석되기도 한다. 동물원과 동물권의 문제가 너무나도 간단하고 손쉬운 봉합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영화가 앞서 펼쳐 놓은 주제의식을 너무 단순한 것으로 치환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쇼트를 영화 속 유일한 동물 캐릭터에게 배당한 것만으로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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