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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28. 2020

가족을 경유해 괴리감을 가로지르는

<페어웰> 룰루 왕 2019

 뉴욕에 사는 중국계 미국인 빌리(아콰피나)는 작가를 꿈꾸고 있지만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 지원한 지원금에는 탈락하고, 월세는 밀리기만 한다. 그러던 와중 고향인 중국 창춘에 살고 있는 친할머니(슈전 자오)가 폐암 말기이며 3개월의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질병 유무를 알리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게 하는 ‘선한 거짓말’이 관례인 중국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대신 빌리의 사촌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꾸며내 할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에 가족들이 모일 자리를 만들어낸다. 빌리 또한 중국으로 향하게 되고, 할머니와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게 된다.

 <페어웰>은 룰루 왕 감독이 겪었던 가족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 또한 중국계 미국인이기에, 극 중 빌리처럼 할머니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과 가족이라는 전통 아래 선의의 거짓말을 이어가야 하는지 사이에서 윤리적인 고민을 했을 것이다. 빌리는 뉴욕의 길을 걸으며, 할머니는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둘이 통화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중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중국인과 어릴 적에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 사이의 간극을 단박에 보여준다. 그 간극은 할머니의 병이 가족들에게 알려지고, 가족들이 중국 창춘에 모이며 더욱 커져간다. <페어웰>이 단순히 빌리의 ‘뿌리 찾기’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는 이 간극을 회피하며 중국과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인물들을 통합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가짜 결혼식을 위해 모인 가족들이 자아내는 명절 분위기와 할머니의 중병이라는 초상집 분위기 사이에서 떠도는 인물들은 하나로 뭉칠 수 없는 집단이기도 하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대가족의 모습은 가족이라는 허술하면서도 강력한 틀이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는 이미지이다. 빌리의 가족은 미국에, 큰아빠의 가족은 일본에, 고모의 가족은 중국에서 각자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 빌리의 아버지와 큰아빠는 25년 만에 함께 고향을 찾았다. 빌리와 할머니의 관계를 중심으로 삼는 이야기이기에 크게 다뤄지진 않지만, 빌리의 아빠, 큰아빠, 고모가 만들어내는 묘한 다름과 그것을 통한 긴장감이 식탁 장면들에서 발현된다. 인물들을 한 숏에 담기보단 두 세명 정도로 다소 무작위인 것처럼 보이도록 나누어 촬영하고, 그 숏들을 이어 붙여 가족이라는 전체를 구성하는 식사 장면들은 할머니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 금방이라도 해체될 것만 같은 집단이다.

 물론 <페어웰>은 동아시아 특유의 보수적인 면모도 담고 있다. 가족이라는 틀은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깨져선 안 되는 것이며, 가족 모임에서의 가사노동은 며느리나 고모 등 여성 구성원들의 몫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대장 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아버지의 말은 미국, 중국, 일본을 막론하고 절대적이다. 하지만 <페어웰>의 목적은 동아시아 특유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미국에 내던져졌다고 해도 무방할 빌리의 디아스포라를 포착한다. 감독인 룰루 왕처럼 중국-한국계 미국인인 주연배우 아콰피나의 정체성은 빌리라는 캐릭터와 연결되어 있다. 그 역시 중국에 있는 할머니가 있고, 미국에 사는 부모가 있다. 할머니가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빌리는 자신이 오랜 기간 느껴온 괴리감을 러닝타임 내내 표출한다. 그 괴리감 자체를 체화한 아콰피나의 얼굴은 세계 곳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초상이다. 

 대부분의 숏이 대가족의 얼굴들로 가득한 영화에서 종종 빈 공간을 담는 숏들이 등장한다. 대부분은 공간에 있던 인물들이 프레임 밖으로 퇴장하며 발생하는 빈 공간들이다.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지 않고, 편집은 공간을 조금 더 지긋이 바라본다. 세계 곳곳에 위치한 가족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한다. 가족이라는 집합은 수많은 부분 집합과 교집합으로 세분화된다. 영화 곳곳에 산재한 빈 공간들은 가족의 부분 집합들 밖에 위치한 여집합이다. 여집합으로서의 공간은 가족들을 모이게 하는 병원, 결혼식장, 호텔 복도, 할머니의 집 등이다. 각 공간들은 무의미한 장소일 수 있으나, 가족의 부분 집합들이 만나고 교집합을 형성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공동묘지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묘에 절을 올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가족들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백사장의 모래와 같다. 쌓아 올릴 수 있지만 이내 흩어지는 것. 통합과 해체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 두고 그 사이의 괴리감을 견디는 것. 룰루 왕은 <페어웰>을 통해 가족을 집합으로 규정하고 그 간극을 탐색한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물리적, 문화적, 시간적 간극은 그 괴리감을 가시화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뉴욕으로 돌아온 빌리는 텅 빈 자신의 집에 들어오고, 뉴욕의 길거리를 걷다 할머니가 자주 하던 기합을 난데없이 내지른다. 할머니의 집 앞에 있는 나무의 새들이 날아가는 숏은 그 기합소리에 새들이 날아가는 것 같은 착시를 준다. ‘뿌리 찾기’라는 보수성의 혐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빌리의 기합소리와 이어지는 숏은 텅 비고 가득 찬 공간을 가로지르며 닿고자 한 곳에 도착한다. <페어웰>은 그렇게, 가족이라는 다소 보수적이고 안전한 틀 안에서 지리적, 문화적, 시간적, 사회적 괴리감을 가로질러 자신이 있고자 한 공간에 닿으려는 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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