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눈엔 이 영화도 붉게 보이겠지

제주 4.3사건 다룬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1948년 11월 미 군정하의 당국은 제주 섬에 소개령을 내렸다. 해안선 5km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멸 감독의 2013년 개봉작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는 위와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지슬’은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의미한다. 소개령을 듣고 산 속으로 피난한 제주도 주민들이 함께 지슬을 나눠 먹으며 버틴 데서 비롯된 제목이다.

<지슬>은 상당히 독특한 영화이다. 21세기에 나온 영화임에도 흑백이고, 한국어로 진행되는 영화임에도 한글자막이 달려있다. 영화의 두 가지 특징은 영화의 주제를 더욱 또렷하게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피난민과 군인 사이의 사건들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주체이긴 하다. 허나 흑백영상과 한글자막이라는 독특한 방식이 없었다면, <지슬>은 <화려한 휴가>처럼 아픈 과거를 다룬 평범한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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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흑백의 영상을 살펴보자. 1935년 최초의 장편 컬러영화가 나온 이후로 40년대와 50년대를 거치며 대부분의 영화들이 컬러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컬러가 상용화된 이후 흑백영화가 제작된 사례를 찾아보면, 면이 너무 잔인해서 흑백으로 촬영된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 흑백무성영화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미셀 하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2011) 등이 있다. 이렇게 컬러영화 시대에 굳이 흑백영화를 선택한다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슬>이 흑백영상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지슬>에서 흑백영상를 선택한 이유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진영논리를 생각해 봐야한다. 당시 자본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빨갱이’라고 부르며 남한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 속 군인들도 빨갱이를 모조리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주도에 도착한다. 그러나 제주도에 그들이 말하는 빨갱이들이 있었을까. 군인들은 빨갱이는커녕 파란색도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색깔을 찾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런 색도 들어가지 않은 흑백의 영상은 의미를 가진다. 색깔이 없는 곳에서 빨간색을 찾는 헛된 짓을 흑백의 영상이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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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할 수 있었던 흑백영상과는 달리 한글자막은 <지슬>에서 필수적이다. 거의 외국어나 마찬가지인 제주도 방언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막이 필수이다. 자막이 없었다면 영화의 제목인 지슬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한글자막과 외국어처럼 들리는 제주도 방언이 묘한 효과를 준다. <지슬>을 마치 외국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해준다.

이 느낌은 우리 귀에 익숙한 표준어나 경상도, 전라도 방언을 쓰는 군인들이 등장하면서 깨진다. 군인들의 대사들 들으며 영화의 배경이 대한민국 영토인 제주도임을 새삼 깨달았다.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영화를 관람하다가 ‘아참, 우리나라의 이야기였지’라고 깨달을 때의 충격이 상당했다.

한국영화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흑백영상과 한글자막은 <지슬>의 주제의식을 강화시켜 준다. 제주 4.3사건이라는 크나큰 근현대사의 비극을 완벽한 형식미로써 담았다. 형식과 주제가 일치되는 것이 좋은 영화의 조건이라면, <지슬>은 만점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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