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극이 개척해 왔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간

토미 리 존스 연출&주연 서부극 <더 홈즈맨>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스포일러 있음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서부 개척이 인디언 야만인들을 상대로 승리한 백인 문명인들의 승리가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이었을 뿐임을 고발하는 경향의 서부극들을 일컫는다. 195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의 등장과 함께 힘을 얻어 등장한 수정주의 서부극은, 같은 내러티브를 가진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이를 극한의 체험으로 몰아붙인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수정주의 서부극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 <헤이트풀8>처럼 흑인 노예제와 인종차별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고, 존 맥클린의 <슬로우 웨스트>처럼 서부극 안에서 여성 캐릭터의 기능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토미 리 존스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서부극 <더 홈즈맨>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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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 캐릭터의 기능뿐만 아니라 서부극이 그 동안 함부로 다뤄온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담겨있다. 영화는 네브라스카에 사는 커디(힐러리 스웽크)가 우연히 목숨을 구해주게 된 브릭스(토미 리 존스)의 도움을 받아 정신병에 걸린 세 여인을 아이오와로 이송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독특한 점은, 서부를 개척하기 위해 서부로 달려가던 인물들이 반대로 서부에서 동부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꾸로 돌아간다는 영화의 플롯 자체가 반성과 성찰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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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커디와 브릭스가 이송하는 세 여자는 각각 아이의 죽음, 남편의 강간, 남편의 폭행으로 인해 정신병이 생겼다. 아이의 죽음은 곧 남편의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서부 개척이라는 명목으로 무관심과 강간, 폭행의 대상이 된 여성들이 그 동안 서부극에서 거의 없었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인해 지옥 같은 서부에서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헌데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 커디는 영화 중반 돌연 자살을 택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서부극의 배경이 되는 19세기에 주체적인 여성이 설 자리는 정녕 없었던 것일까. 마을의 다른 남자들 못지않은 노동력, 생산력, 재력, 책임감을 갖추고, 정신병에 걸린 여자들을 어떻게 하면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지 알았던 커디는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 걸쳐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남자들은 커디를 보고 ‘매력이 없다’, ‘너무 잘난척한다’라고 말한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만이 매력이던 시절에 커디는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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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브릭스는 세 여자를 데리고 마침내 아이오와에 당도한다. 브릭스 목적지인 목사의 집에 여자들을 내려주고 그들이 왜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목사의 아내에게 설명해주려 한다. 목사의 아내는 거북해하며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한다. 그제야 브릭스는 깨닫는다. 강인함과 솔직함, 보살핌이 공존하던 커디는 특별한 존재였다. 이를 깨닫고는 그녀의 묘비를 만들어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주러 떠난다.

커디는 죽었지만, 서부 개척의 신화에 가려진 여성들의 고통은 드러났다. 그녀의 묘비는 결국 강바닥으로 가라앉았지만, 희생당한 서부시대 여성들의 고통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때 서부극의 단골 출연자였던 토미 리 존스는 이렇게 성찰과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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