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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2. 2020

잡는 대신 잘 엮었어야 할 지푸라기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김용훈 2018

 사라진 애인 연희(전도연) 때문에 박 사장(정만식)의 사채 독촉에 시달리며 한탕을 꿈꾸는 태영(정우성). 치매 증세를 보이는 엄마 순자(윤여정)와 항만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아내 영선(진경)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목욕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만(배성우). 중국에서 밀입국한 진태(정가람)를 우연히 만난 유흥업소 직원 미란(신현빈). 김용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중만이 일하는 목욕탕 탈의실 사물함에 누군가 돈가방을 숨기고, 그것을 중만이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려한 캐스팅의 수많은 인물들이 돈가방을 두고 벌이는 범죄와 배신의 이야기를 영화는 담아낸다. 

 비선형적 서사 구조와 범죄극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펄프 픽션>은 다양한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들의 일부들을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보여주며 관객이 영화의 타임라인을 구성하도록 유도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또한 어느 정도 그런 효과를 유도한다. 돈가방을 숨긴 사람은 누구일까? 돈가방은 누구, 어디를 거쳐 전달된 것일까? 누가 이 돈가방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 것? 하지만 이 영화는 <펄프 픽션>처럼 관객과 퍼즐 게임을 즐기는 작품은 아니다. 어쩌면 관객들이 이러한 퍼즐에 너무 잘 훈련되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식상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비선형적 구조를 취하며 돈가방을 둘러싼 서사들을 퍼트리는 이 영화는 예상보다 너무 친절하다. 이름 모를 인물이 돈가방을 목욕탕 사물함에 놓고 사라진 이후 장면을 보자. 청소하는 중만과 탈의실에 걸려 있는 TV가 보인다. 영화는 TV를 집중해서 보여주진 않지만,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와 뉴스 자막은 명확하게 보이도록 한다. 프레임 안에 TV가 들어오지 않는 숏에서도 앵커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이것은 보물상자를 찾을 수 있는 비밀지도가 타임스퀘어 한 귀퉁이의 전광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놓치기엔 너무 뚜렷하게 제공되는 힌트를 기억하고 각 인물들이 소개되는 6부 구성 중 첫 1부를 관람한다면, 사건의 전말은 시시한 게 된다.

 이를 보완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배우들의 연기이다. 윤여정, 전도연, 정우성과 같은 중견 배우부터 신현빈과 정가람이라는 신인을 아우르는 영화의 배우진은 각자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다. 하지만 그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사채업자를 연기하는 정만식, 유흥업소 마담을 연기하는 전도연, 보잘것없는 가장을 연기하는 배성우는 굳이 보지 않아도 손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인물과 연기이다. 비록 극을 휘어잡는 전도연과 최근작에서 볼 수 없었던 ‘호구 연기’를 선보이는 정우성을 보는 재미가 있지만, 캐릭터 자체의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일종의 군상극이기 때문에 하나의 캐릭터가 돋보인다고 영화 전체의 질이 변화하진 않는다. 그 지점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비슷한 장소와 캐릭터로 가득한 여타 한국영화와 같은 지점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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