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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1. 2020

데칼코마니의 전장을 달리는 애매한 이유

<1917> 샘 멘데스 2019

*스포일러 포함


 세계 1차 대전이 한창인 1917년, 벨기에 전선에서 전투 중인 영국군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는 에린무어 장군(콜린 퍼스)으로부터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2대대 멕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할 것을 명령받는다. 두 사람은 무인지대(No Man’s Land)를 비롯한 전장을 가로질러 달려간다. 샘 멘데스의 <1917> 그의 할아버지인 알프레드 H. 멘데스가 1차 대전 당시 경험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물론 알프레드는 자신의 키보단 높은 안개 덕분에 영화 속의 전장보단 조금은 안전하게 명령을 전달했다고 한다. <1917>은 단 두 개의 테이크(물론 여러 테이크를 이어 붙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편집점들이 눈에 띄지만)를 통해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여정을 담아낸다. 마치 전장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마라톤 평원을 가로지른 페이디피데스의 이야기를 리얼타임으로 관람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1917>은 선사하려 한다.

 물론 <1917> 이전에도 영화 전체를 하나 혹은 소수의 테이크로 구성한 작품은 있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이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은 영화의 거의 전체를 한 숏처럼 연출한 작품이었다.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오손 웰즈의 <악의 손길>이나 장 뤽 고다르의 <주말> 같은 작품은 7~20여분의 시간을 한 테이크로 선보이며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17>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작품을 꼽자면 역시 1차 대전을 다룬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의 참호 롱테이크 장면이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에린무어 장군을 만나고 여정을 시작하는 초반부의 기나긴 참호 장면은 <영광의 길>에 바치는 오마주나 다름없다. 큐브릭이 참호에서 돌아다니는 병사의 앞과 뒤를 각각 스테디캠으로 촬영한 두 개의 롱테이크를 교차 편집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1917>의 카메라는 참호의 꺾이는 길이나 다른 병사와의 충돌 등을 사용해 두 주인공의 앞과 뒤를 오간다. 

 대부분의 영화는 시간을 압축하여 전달한다. 그것은 러닝타임을 조금 초과하는 몇 시간 정도부터, 수백, 수만 년의 시간까지 다양한 길이를 갖는다. 반면 <1917>과 같은 시도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극 중 시간과 동일하게 가져간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약 16km의 거리를 이동하는 시간은 약간의 점프를 제외하면 러닝타임과 동일하다. 어쨌거나 이들이 이동하는 시간만큼 카메라와 공간도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러닝타임의 일부를 롱테이크를 채우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비티>의 롱테이크는 단순히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한 도입부의 장치였고, <악의 손길>의 롱테이크는 영화를 미리 요약하는 오프닝 시퀀스였으며, <영광의 길>의 롱테이크는 법정영화로 변모하는 극의 후반부를 위한 알리바이와 같다. 반면 영화 전체를 한 테이크처럼 연출한 작품들은 현장성 또는 연극성을 갖는다. 히치콕의 <로프>는 두 주인공이 느끼는 압박감을 끝없는 재프레임화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었고, 이냐리투의 <버드맨>은 배우인 주인공의 상황 자체를 하나의 극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다면 <1917>의 롱테이크 전략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917>의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의 롱테이크 전략은 영화와 명확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배틀필드]와 같은 게임을 연상시키는 현장성을 위해? 페이디피데스처럼 전장을 가로질러 소식을 전달하는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용기, 책임감, 집념, 애국심 등을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시체를 지나치고 밟아가며 명령을 전달하는 두 병사가 느낄 참혹함과 허망함을 위해? 그 속에서도 존재하는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단순히 샘 멘데스의 할아버지가 직접 겪었던 치열한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 이것은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이 중 몇 가지만 맞을 수도 있다. 무엇이 <1917>의 주제인지 선별하고, 그것과 롱테이크 전략 사이의 연관성을 따지는 일은 크게 의미 없다. 앞서 언급한 문장들은 영화 내에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17>에서 무엇을 보느냐는 관객 개개인에게 달린 몫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샘 멘데스와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의 전략은 애매하다. 어쩌면 이들은 롱테이크로 전장을 담기 위해 1차 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것일지도 모른다. 통상적인 상업영화의 러닝타임(100~120분)을 한 두 개의 테이크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전쟁이 바로 1차 대전이다. 2차 대전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된 무전기와 폭격기, 수송기는 전쟁의 성격을 시간적 파편으로 만들었다. 2차 대전부터 베트남전이나 걸프전 등 1차 대전 이후의 전쟁을 다루는 영화들은 군인들의 이송, 폭격, 무선통신을 통해 전쟁을 수많은 숏으로 쪼개어 진행한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2차 대전을 통해 도입되고 발명된 기술은 <1917>의 서사가 성립하는 조건들을 구식으로 만들어버린다. 샘 맨데스가 어떻게 <1917>을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완성된 영화가 주는 인상은 기술적으로 놀라운 완성도를 선보이는 이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는 애매하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의 형(리처드 매든)이 나누는 악수다. 나무에 기대 쉬고 있는 스코필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에 기대 휴식을 취한다. 그는 참호에서 참호로, 진창에서 진창으로, 누군가의 시체 위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시체 위로 이동한다. 유사한 공간과 상황의 조응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후반부의 악수는 죽어가는 블레이크의 손을 잡는 장면과 조응한다. 손에서 손으로,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손에 있던 반지를 그의 형에게 전달하고 그와 악수를 나눈다. 따지고 보면 <1917>은 데칼코마니다. 스코필드가 잠시 기절하고 등장하는 암전 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암전 전에 벌어진 사건의 역순이다. 페이디페데스는 전장 밖으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렸다면, 스코필드는 전장에서 전장으로 달린다. 죽어가는 전우와 붙잡은 손에서 그의 형제와 나누는 악수로,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유사지만 조금은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1917>의 양면은 전쟁보단 그것을 통과하는 개인을 비춘다. <1917>의 애매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두 개의 롱테이크라는 거대한 형식은 개인을 향할 뿐, 개인을 둘러싼 상황을 비추지 못한다. 개인을 향해 조직된 상황만을 목격하는 카메라는 시선을 확대하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전쟁이라는 상황에 내던져진 스코필드뿐이다. 우리는 스코필드가 장군의 편지를 전달해야 하는 수많은 불확정적인 이유를 댈 수 있지만, 그것은 그가 달려야 하는 가장 명백한 이유, 즉 생존을 슬그머니 영화 바깥으로 미뤄둔다. 스코필드는 왜 전장에서 생존을 위해 달리는가? <1917>은 불확실한 답변을 흩뿌리며 그것을 애매하게 회피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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