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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19. 2020

'기억하기'라는 투쟁

<기억의 전쟁> 이길보라 2018

 1955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다. 1964년 미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동맹국인 한국도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한다. 파병을 통해 한국군은 전쟁 특수를 얻었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그 이면에는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있다. 지금은 한국인들도 즐겨 찾는 휴양도시 다낭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은 매년 음력 2월이면 곳곳에서 향이 피워진다. 1968년 2월에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위령제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이들에겐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곧 투쟁이다. 

 <기억의 전쟁>에는 위령제가 끝없이 나온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주기적으로 호명하며 기억을 연장시키는 의식. 이것은 기억을 잊지 못하는 자의 쉽게 잊어버리는 자에 대한 투쟁이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위한 베트남의 위령제와 기억하지 않는 것을 위한 한국의 위령제는 ‘잊을 수 없음’을 연장한다. 한국국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 응우옌 티 탄의 기억(증언)은 존재함으로써 투쟁이 된다. <기억의 전쟁>은 그 투쟁을 기록해 나가는 영화였다. 기억은 시각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그것을 떠올리는 것과 말하는 것은 청각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응우옌 티 탄의 기억은 사운드로 영화 속에 존재하고 기억된다. 또 다른 생존자인 아저씨는 한국군이 심어둔 지뢰에 시각을 잃었다. 그에게 기억은 위령제의 소리이다. <기억의 전쟁>이 시각적인 재현 없이도 생존자들의 기억을 전달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 아닐까? 반면 강원도에 베트남 민가를 지어 둔 월남참전용사 만남의 장은 시각적인 것으로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왜곡한다. 거리에 태극기와 확성기를 들고 나온 참전용사들이 국가유공자를 비롯한 여러 훈장이 줄줄이 달린 군복을 입고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기억의 전쟁>은 2019년 인디다큐 페스티벌에서 먼저 관람했고, 2020년 2월 시사회를 통해 다시 관람했다. 그 사이 영화가 재편집되어 크게 달라졌다던가 하는 점은 없지만, 약간 늘어난 러닝타임은 영화에 담긴 시간 이후의 일을 알려주는 자막에 할애된다. 영화는 2018년 진행된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영화의 초반과 후반에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의 자막이 보여주는 것은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응우옌 티 탄은 2019년 제주 4·3 평화재단이 주는 제3회 제주4·3평화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같은 해 4월 102명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및 유족과 함께 한국 정부에 청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고, 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기억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9년 개봉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여러 영화(<주전장>, <김복동> 등)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국가가 피해자의 기억을 인정하고 사과하기 전까진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청각의 기억에 대한 시각적 폭력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임을, <기억의 전쟁>은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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