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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1. 2020

73. <아사코>

원제:  寝ても覚めても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히가시데 마사히로, 카라타 에리카
제작연도: 2018

 <아사코>는 이상하다. 이 영화를 모노가미적 이성애 규범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한 오독에 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 영화를 통해 붕괴시키는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랑’이라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와의 관계를 주저하다가, 3.11 동일본대지진이 있던 날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사라졌던 바쿠는 광고모델이 되어 도시 한복판의 광고판을 통해 재등장한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바쿠가 나타나 손을 내밀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떠난다. 하지만 아사코는 결국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오고, 료헤이와 아사코는 더 이상 서로를 믿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지만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아사코와 료헤이의 (재)결합은 서로에 대한 불신을 신뢰함으로써 성립되는 기묘한 관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기묘한 관계를 포스트-재난 시대의 새로운 태도로 제시한다. 이 태도는 포스트 뒤에 자본주의, 물질주의와 같은 말들을 붙여도 어느 정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의 세계, 문명이라는 조건이 이제 자연화 되어버린 시대에 지진과 같은 재해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영화 초반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무차별 살인/폭행’ 뉴스 또한 통제 불가능한 무엇인가이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뢰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등장하며 붕괴된다. 지금의 세계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광고하며 통제할 수 없는 외부를 은폐한다. 결국 <아사코>가 그리는 세계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에 불신은 이 세계의 필요충분조건이며, 그 조건 하에서 사랑이라는 것 또한 불신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 안에서 3.11를 통해 제시되는 재난 이후 파괴된 신뢰는 복구될 수 없다. 외부에서 무엇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세상인데,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믿는 것 또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복구될 수 없는 신뢰를 계속 끌어 앉고 사느니, 불신을 믿음으로써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역설적인 설정은 포스트-재난의 세계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상상력을 제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사코와 료헤이는 새로운 집에서 같은 강을 바라보며 “아름답다”와 “더럽다”는 전혀 상반되는 반응을 보여준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둘, 그 사이에는 신뢰가 붕괴되어 단절된 둘 사이의 거리감과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재가 존재한다. 사실 이러한 장면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국내에는 올해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2017)의 엔딩에서, 나루미는 외계인에게 몸을 빼앗긴 남편 신지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가져가라고 요청한다. 신지가 그 개념을 가져가자 침략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루미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은 남아있지 않다. 영화는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시점에서, 나루미와 신지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숏-리버스 숏 구도를 보여주며 끝난다. 기요시 또한 <산책하는 침략자>를 통해 3.11 이후를 이야기하며, 그 이후의 사랑이란 분열되며 절대 쌍방일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재난 이후에도, 쌍방향의 신뢰가 사라진 이후에도 함께하겠다며 다짐하는 이들의 시선이 마주치지 못한 채 끝나는 두 영화는 포스트-재난 시대를 맞이한 현재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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