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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12. 2020

98. <윤희에게>

감독: 임대형
출연: 김희애, 나카무라 유코, 김소혜, 성유빈, 키노 하나
제작연도: 2019

 윤희에게 20년 전 첫사랑 쥰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몰래 먼저 편지를 열어본 윤희의 딸 새봄은 쥰이 사는 오타루로의 여행을 계획한다. 임대형 감독의 신작 <윤희에게>는 과거를 묵살당하고 결혼한 중년 동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의 이야기이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의 영향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능청스럽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에 돌진한다. 임대형의 전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6)의 주인공 모금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모금산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자 독립영화감독인 아들을 불러 영화를 찍고자 하는 인물이다. 임대형은 인물의 과거를 대사나 플래시백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대사를 주고받는 인물들은 이미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다. 새로운 정보 대신 인물 자체를 실어 나르는 숏-리버스 숏들은 그 자체로 과거를 설명하고 있다.

 <윤희에게>의 모금산은 새봄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능청스러운 태도는 새봄이라는 캐릭터에 담겨 있다. 새봄은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를 미리 읽어보고, 윤희와 쥰의 과거사를 알게 된다. 수능을 갓 마친 새봄은 능청스러우면서도 단도직입적인 계획을 세운다. 윤희와 함께 오타루로 가 윤희와 쥰이 재회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윤희에게 도착한 쥰의 편지를 부친 이가 쥰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다가 보이는 기차 차창을 비추던 오프닝 크레딧 쇼트에서 이어지는 장면에서, 쥰의 책상을 정리하던 쥰의 고모는 우연히 윤희에게 쓴 편지를 발견하고, 쥰 몰래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다. 윤희와 쥰의 재회는 그 둘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알지 못하는 당사자의 가족들의 어떤 공모에 의해 기도된다.

 윤희와 새봄, 쥰과 고모는 각각 예산과 오타루에서 살고 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두 가족들은 무엇인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윤희는 새봄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알고 있고, 쥰은 책 제목을 보지 않아도 고모가 SF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의 대화는 정보전달이 목적이 아닌 사소한 농담, 집에 돌아왔다는 인사,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의 일탈, 장례 직후의 애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대화 시퀀스는 숏과 리버스 숏이 반복되다 풀숏을 보여주고 다른 시퀀스로 옮겨가는 단조로운 촬영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이들에 대한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영화 초반에 등장한 쥰의 편지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 과거를 추측하게 한다. 영화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윤희와 쥰의 과거는 당사자 간의 대화가 아닌, 두 인물이 각자 가족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사람 키에 가깝게 온 눈은 오타루의 많은 것들을 감추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새봄은 윤희 몰래 오타루에 함께 온 남자친구 경수에게 버려진 기찻길이 눈 밑에 파묻혀 있다고 이야기한다. 후경에 보이는 차단기가 그곳에 철로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어떤 것들은 이렇게 이야기됨으로써, 가려져 있는 것으로써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윤희와 쥰은 결국 재회한다. 얼떨결에 둘의 재회를 계획하게 된 새봄과 고모의 공모는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는 ‘재회’라는 클라이맥스에 힘을 주지 않는다. 재회는 다소 갑작스럽게 이어지고, 짧게 지나간다. 윤희에게 쓰인 편지로 시작된 영화는 쥰에게 쓰인 편지로 마무리된다. 쥰이 윤희에게, 윤희가 쥰에게, 두 편지로 시작되고 끝나는 영화는 거대한 숏-리버스 숏의 구도를 취한다. 윤희와 쥰이 각각 새봄과 고모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은 결국 이 둘이 주고받는 숏까지 연결된다. 과거를 말하는 대신, 현재를 이야기하며 과거를 추측하게 하는 이 숏들은 현재의 시공간에 과거를 쌓아 올린다. 마침내 과거를 설명해주는 윤희의 편지는 카메라가 이들의 얼굴을 오가며 쌓아온 과거를 선명하게 형상화한다. 새봄은 윤희의 카메라로 촬영한 필름을 사진사인 외삼촌에게 맡긴다. “왜 인물사진은 찍지 않느냐?”라고 묻는 외삼촌의 질문에 “저는 아름다운 것만 찍어요.”라고 대답하는 새봄은 윤희를 찍는다. 경수는 새봄을 찍고, 새봄은 윤희를 찍고, 마지막에서야 다시 카메라를 든 윤희는 새봄과 경수를 찍는다. 이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서로이다. 영화는 새로운 생활을 꾸려보려는 윤희를 촬영하는 새봄(이 들고 있는 카메라)의 시점숏으로 끝난다. 윤희와 쥰의 과거는 윤희가 그 시절에 촬영한 쥰의 사진처럼 간직되고, 계속 갱신되는 현재 위에 있을 것이다. <윤희에게>는 그렇게, 과거를 현재 위에 쌓아 올리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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