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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12. 2020

97.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원제: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감독: 셀린 시아마
출연: 아델 에넬, 노에미 메를랑, 루아나 바야미
제작연도: 2019

 셀린 시아마의 네 번째 장편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2010년대에 제작된 여러 여성 퀴어 영화들과 함께 여성 감독, 여성 배우의 성취를 알리는 작품이다. 그 동안 셀린 시아마는 다양한 계층, 인종, 직업을 지닌 여성 인물들을 다뤄왔다. <워터 릴리즈>(2007)에선 학생과 청소년 싱크로나이즈 선수가 주인공이고, <톰보이>(2011)에서는 젠더 정체성에 대해 고민중인 초등학생이 주인공이며, <걸후드>(2014)는 프랑스 빈민가에 사는 여성 청소년이 주인공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두 주인공은 각각 화가이자 반강제적인 결혼을 앞둔 이름 있는 가문의 여성이다. 이번 영화의 두 주인공만이 비청소년이라는 점이 독특한 부분이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시선과 침범이다. 각 영화의 주인공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의 영역에 침범하거나 자신의 영역에 다른 여성들이 침범해오는 상황에 놓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대부분 사랑 혹은 연대로 이어진다. <워터 릴리즈>에서 플로리안에게 접근하는 마리, <톰보이>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소녀 리사에게 접근하는 로르/미카엘, <걸후드>에선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마리엠을 불러 세우는 세 명의 탈학교 여성,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엘로이즈의 집으로 들어온 마리안느. 

 그리고 반대 방향의 침범도 존재한다. 이것은 여성(들)의 공간에 침입하는 남성(들)이다. <워터 릴리즈>의 후반부 마리와 플로리안은 파티에서 키스를 나눌듯 말듯 춤을 추고 있다. 어느 순간 프로리안은 자신의 뒤에 나타난 남자친구 프랑수아와 춤을 추고, 마리는 정지한다. 이 장면은 <걸후드>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범죄조직을 이끄는 남성 아부 밑에서 일하게 된 마리엠은 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고, 룸메이트인 모니카와 함께 춤을 춘다. 그러던 중 모니카는 춤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고, 마리엠의 뒤엔 아부가 나타나 함께 춤 출 것을 요구한다. 마리엠이 거부하자 아부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톰보이>에서는 조금 다르다. 10살의 아이가 파티에 가진 않기 때문이다. 로르/미카엘은 친구들과 축구를 하던 중 아무렇지 않게 들판에 오줌을 싸는 남자 아이들을 본다. 자신도 소변이 마렵지만 여성의 신체를 지닌 그는 그것을 아이들에게 밝힐 수 없다. 그는 슬그머니 숲으로 들어가 소변을 본다. 그러던 중 함께 놀던 한 남자아이가 뒤에서 나타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또한 약간의 변형이 일어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집으로 향하는 초반 시퀀스 외에 남성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엘로이즈를 데려가기 위하 한 남성이 마리안느, 엘로이즈, 하녀 소피만이 있는 집에 들어온다. 식당 문을 연 마리안느는 소피가 차린 음식을 먹고 있는 남성을 발견한다.

 두 종류의 침입을 매개하는 것은 시선이다. <워터 릴리즈>에서 춤의 정지와 함께 플로리안의 뒤로 찾아오는 남성을 응시하는 마리의 시선, 혹은 플로리안의 싱크로나이즈 경기를 지켜보는 초반부 마리의 시선. <톰보이>와 <걸후드>에서는 침범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던 로르/미카엘과 마리엠의 시선이 엔딩숏에 이르러 무엇인가 침범해왔던 그 방향 혹은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러한 시선을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초상화를 그리러 온 마리안느는 필연적으로 엘로이즈를 관찰해야 한다. 그림은 시선을 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의 대상이 된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시선을 되돌려준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 소피만이 남아있는 그 공간에서 두 사람의 시선은 접촉한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한 결탁으로, 소피의 임신중단 에피소드를 통한 세 여성의 연대로 확장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엘로이즈를 데리려 온 남성의 침입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의 결말이 찾아오는 것을 담아낸다. 하데스가 데려간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향한 오르페우스 신화를 차용한 영화의 후반부는 다신 보지 못 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보려는, 그 마지막 시선을 영화는 담아낸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집을 떠난 이후 그는 엘로이즈를 두 번 만난다. 한 번은 살롱전시에서 본 엘로이즈와 그의 딸이 그려진 초상화, 다른 한 번은 음악회에서 저 멀리 앉아 있는 엘로이즈의 옆모습. 마리안느는 다시는 엘로이즈의 시선을 되돌려받지 못한다. 대신 그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마지막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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