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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19. 2020

<온다> 나카시마 테츠야 2018

*스포일러 포함


 이제 막 결혼한 히데키(츠마부키 사토시)와 카나(쿠로키 하루)는 딸 치사를 낳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히데키는 카나가 임신했을 때부터 육아 블로그를 운영해왔고, 완벽한 아빠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를 파워 블로거로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의 히데키를 쫓아왔던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다시 나타나 가족을 위협한다. 히데키는 친구이자 민속학과 교수 츠다(아오키 무네타카)와 그의 지인인 노자키(오카다 준이치)는 일본 제일의 무당 코토코(마츠 다카코)의 동생인 영매 마코토(코마츠 나나)를 소개해준다. 마코토는 히데키의 집에 강력한 무엇인가가 왔음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히데키와 카나의 일상은 파괴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 <갈증> 등을 통해 알려진 나카시마 테츠야의 <온다>는 일본 호러소설대상에서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한 사와무라 이치의 소설 『보기왕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 오컬트 호러영화다. 영화는 히데키, 카나, 노자키 세 명의 시점의 (실제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3부 구성을 취하고 있다.

 러닝타임 절반까지의 <온다>는 제니퍼 켄트의 <바바둑>이나 바박 안바리의 <어둠의 여인>과 같은, 혹은 호러라는 장르 틀을 벗어난다면 <82년생 김지영> 같은 작품까지 엮을 수 있을, ‘육아 익스플로테이션’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작품들과 결을 같이한다. 히데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1부는 다소 자기중심적인 샐러리맨 히데키가 아이와 아내를 위해 헌신하고, 보기왕(극 중에서 명확하게 지칭되진 않지만 편의상 쓰자면)이 다가오자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종종 등장하는 히데키의 블로그는 그러한 히데키의 모습을 영화 안팎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카나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2부에서 뒤집힌다. 히데키는 자기중심적 인물이며, 그의 고등학교 동창 츠다는 ‘빈 깡통 같은 사람’이라 히데키를 묘사한다. 블로그와 아빠 모임에 열중하는 그는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치중하지만, 실제 육아는 등한시한다. 가령 카나는 요리에 열중하고 있고 딸 치사는 기저귀를 갈아 달라며 울고 있는 상황에서, 히데키는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블로그 조회수를 들여다보고 있고, 카나는 부엌과 치사 사이를 오가며 가사노동과 육아를 동시에 소화한다. 그런 와중에 히데키는 카나에게 아이에게 악영향이 갈 수 있으니 짜증 내지 말 것을 주문한다.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히데키의 어린 시절은 그와 한 소녀가 숲 속에서 나비 등을 죽이는 모습과 함께, 소녀가 어린 히데키에게 “너는 거짓말쟁이니까 그것이 올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히데키는 거짓말쟁이다. 그는 빈 깡통 같은 사람이며, 가정 내의 일보단 겉에서 보이는 모습에 충실하다. 영화 초반부의 히데키 고향집 시퀀스나 결혼식 시퀀스부터 그 징조가 곳곳에 널려 있다. 소위 ‘인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내팽개친 인물이 히데키인 셈이다. 2부의 카나는 홀로 치사를 키운다. 그는 육아, 가사노동, 생계노동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카나는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는 자신을 홀로 키운 (사실 방치에 가까웠던)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고 수차례 다짐하지만, 자신을 도와줄 친구도, 가족도, 지인도 없는 상황에서 카나는 좌절한다. 결국 치사를 내버려 두고 내키는 대로 살려던 카나 앞에도 보기왕이 나타난다. 카나는 마코토의 도움으로 보기왕이 찾아온 집에선 도망치지만, 치사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리고 의문의 3부가 시작된다. 관객은 갑작스레 중심인물의 위치에 오른 노자키가 아기를 들고 강물 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암흑 같은 강물 밖에선 “네가 바라던 대로 아이를 버려”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노자키는 전 애인에게 낙태를 강요했던 사람이며, 현재 함께하는 마코토는 불임인 상태이다. 때문에 3부의 초반을 보고선 장재현의 <사바하>가 떠올랐다. 민간신앙을 중심으로 한 오컬트, 어린아이의 양육과 낙태라는 공통된 장르와 소재 때문이다. 하지만 <온다> 또한 <사바하>와 유사한 방식으로 실패한다. <사바하>의 경우 민간신앙과 천주교, 사이비 개신교, 불교, 도교가 뒤섞인 세계관 속에서 여아 낙태는 또 다른 영화 밖 사건을 매개하는 소재처럼 다뤄졌다. 그러니까, <사바하>의 주제와 여아 낙태라는 소재는 완전히 결합되진 못했다. <온다> 또한 유사하다. 육아와 낙태 등의 소재는 오롯이 소재로써만 기능한다. 치사의 내면이 보기왕과 결합했다는 영화의 결말부에 가서야 ‘어떠한 이유에서든 홀로 남겨지는 아이’라는 사회문제를 슬그머니 꺼낼 뿐이다. 게다가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 즉 아이를 갖지 못하는 마코토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던 노자키가 치사와 함께하게 되는 모습은 당혹스럽다. 

 노자키, 마코토, 치사가 함께하는 엔딩이 당혹스러운 것은 그 앞까지 진행된 코토코의 굿 장면 때문이다. 히데키와 카나가 죽은 이후 모습을 드러내고 보기왕을 잡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코토코는 히데키와 카나가 살던 아파트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보기왕에 대항하는 굿을 시작한다. 그것은 보기왕에게 잡혀간 것으로 간주되는 치사와 마코토를 다시 불러오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코토코 한 사람만이 굿을 하는 게 아니다. 1부에 잠시 등장했던 할머니 무당을 비롯해 코토코의 고향인 오키나와에서 올라온 노년의 무당들, 중국의 무당이나 여고생 무녀, 심지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궁서체로 적힌 현수막을 세워 두고 굿판을 벌이는 한국의 무당, 더 나아가 오컬트 현상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는 과학자 무리까지 동원된다. 각양각색의 무리들은 아파트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원에서 록 페스티벌에 버금가는 ‘굿 페스티벌’을 벌인다. 물론 그 중심에는 히데키의 집에서 굿을 하는 코토코와 이를 지켜보는 노자키가 있다. 준비과정까지 포함하면 20분이 넘어가는 이 거대한 굿 시퀀스는 관객들이 나카시마 테츠야의 영화에서 기대했을 법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괴이한 굿판, 범람하는 피, 거대하게 확대된 보름달 등은 <하우스> 등의 컬트 영화를 연출한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의 이미지들이 나카시마 테츠야 답게 잘 만들어지긴 했으나 예상할 수 있는 그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에 머물렀다면, 적어도 이 클라이맥스 굿판만큼은 그의 야심이 돋보인다.

 하지만 그 야심은 미봉책에 머무르는 결말로 인해 애매하고 가장 손쉬운 길을 택하고 만다. 단순한 권선징악의 이야기로 흘러가버리는 <사바하>의 맥 빠지는 엔딩과 <온다>의 엔딩은 그런 맥락에서 닮았다. 1부와 2부 중간까지 영화가 지적하고 있는 육아의 문제와 3부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거대한 굿판의 힘은 134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지만, 애매한 엔딩은 그 과정을 무효화한다. 특유의 스타일을 끝까지 밀고 나간 <불량공주 모모코>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원작을 읽으며 상상했던 이미지를 적절하게 구현해준 <고백>에 비해 <온다>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3부 클라이맥스의 힘은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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