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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01. 2020

<이장> 정승오 2019

 혜영(장리우), 금옥(이선희), 금희(공민정), 혜연(윤금선아)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이다. 연락이 닿질 않는 막내 남동생 승락(곽민규)을 제외한 채 모두가 모였지만, 이들의 큰아버지는 ‘장남’이 없다는 이유로 이장을 허락하지 않고 승락을 데려올 것을 요구한다. 게다가 유해를 화장하기로 이미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은근슬쩍 유해를 매장할 것을 요구한다. 정승오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장>은 ‘이장’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식 가부장제가 네 자매의 삶을 어떻게 옥죄이고 있는지를 스케치한다. 

 다소 귀엽고 즐거운 코미디처럼 홍보된 예고편이나 포스터와는 달리 <이장>은 러닝타임 내내 답답하다. 싱글맘인 혜영의 아들 동민(강민준)은 학교 교사의 말을 듣지 않아 혜영에게까지 연락이 오는 일이 부지기수이고, 직장에 육아휴직을 요청하자 퇴직을 권고받는다. 둘째 금옥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남편 및 시댁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 셋째 금희는 애인과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만 철없는 애인 때문에 고생을 면치 못하며, 아직 대학생인 넷째 혜연은 학교 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한 운동 중이다. 그리고 막내이면서 장남인 승락은 러닝타임의 절반 가까이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각기 다르지만 ‘가부장제’라는 하나의 공통된 근원을 지닌 문제를 품은 네 자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스케치한다. 이들 각자의 사연은 아버지의 묘 이장이라는 공동의 사건이 진행되며 하나둘씩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심 사건은 이장(을 위한 승락 찾기)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연들은 잠시 등장하는 것에 그친다.

 물론 <이장>이 스케치하는 각자의 사연이 분리된 것은 아니다. 연애와 학내 성폭력부터 결혼과 육아, 직장생활과 경제권에 이르는 영화의 폭넓은 관심사는 승락의 등장과 함께 가부장제라는 문제의 근원으로 귀결된다. 승락은 오남매 중 유일하게 자신의 문제를 직접 발화하지 않는 인물이자, 굳이 그 문제를 스스로 들춰낼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그가 ‘막내’이자 ‘장남’이며 ‘남성’으로써 얻은 권력은 발화의 시간을 자의적으로 정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그는 네 명의 누나들로부터 숨고, 이장이라는 가족사로부터 숨고, 전 애인으로부터 숨는다. 그리고 네 명의 누나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왔을 때 그는 발언권을 행사한다. 때문에 대사량이 상당한 <이장>에서 유독 승락과 큰아버지만 말이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두 명의 남성은 자신이 원할 때 발언하고 원할 때 입을 다문다. 그것은 가부장제가 형성한 관계망 속에서 가능해지며, <이장>은 그 답답한 권력(들)을 묘사한다. 그 끝에서야 네 자매의 분노가 모습을 드러내고, 가부장제는 해체되지 않는다. 

 <이장>의 결론은 그것이다. 가부장제가 두 남성에게 부여한 권력에 대항해 애매한 연대를 시작한 네 자매는 분노하지만 그것은 한 가족 내의 가부장제에 어떠한 타격도 입히지 못한다. 네 자매가 각기 지닌 사연은 고스란히 남아있고, 승락과 큰아버지는 자연스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발언하지 않을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카메라는 이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가족들을 각기 다른 숏으로 나눠 보여준 뒤, 이들이 함께 타고 있는 자동차의 전체를 훑는다. 그에 앞서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오남매가 큰아버지의 시골집 마루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도 보여준다. 결국 <이장>은 여러 사연을 스케치하고 그것의 근원으로 가부장제를 내세운 뒤 가족으로 회귀한다. 작년 개봉한 이동은의 <니나 내나> 또한 가족 구성원의 내재된 분열을 가족이라는 이름의 회귀를 통해 봉합하는 작품이었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가족에 회귀하고 봉합되는 영화는 세계 곳곳에 널렸다. <이장>에서의 회귀가 유독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가부장제를 겨냥하고 있음을 영화 내외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장>에서 가족으로의 봉합은, 변화는 손쉽게 일어나지 못한다는 결과론보단 가족주의에 가깝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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