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리 주연의 영화 <최악의 하루>
*스포일러 포함
무명 배우 은희(한예리)의 촤악의 하루를 다룬 영화이다. 처음만난 남자 료헤이(이와세 료), 현 남친 현오(권율), 구 남친 운철(이희준)을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 서촌에서 연기수업을 받던 은희는 수업이 잘 풀리지 않자 밖으로 나선다. 길거리에서 길을 물어보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남산에서 남자친구이자 아침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현오를 만난 뒤, 우연히 구 애인이자 바람피던 상대인 운철을 만난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최악의 하루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김종관 감독이 한예리를 은희 역에 두고 각본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희는 무용 전공의 배우라는 점에서 자연스레 한예리가 더오르는 캐릭터이다. 때문에 <최악의 하루>는 '한예리 배우론'을 영화로 풀어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커피와 연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대화의 상대에 따라 목소리 톤과 어조, 표정이 바뀌어 버리는 한예리의 연기, 료헤이의 소설 속 인물처럼(그러니까 각본 속 인물처럼) 행동하는 은희의 모습 등은 <최악의 하루>가 배우에 대한 영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연기 연습을 하던 은희가 현오와 은철을 만나서 벌어지는 과정과 료헤이가 선사한 엔딩이 묘하게 한예리의 필모그래피와 닮아보이는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료헤이와 은희는 자신의 직업, 소설가와 배우를 거짓말을 파는 직업이라 설명한다. 료헤이는 거짓말들이 모여 하나의 연극이 된다 말하고, 은희는 자신의 애인들에게 끝없이 거짓말을 한다. 료헤이는 완전히 엔딩이 나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은희에게 들려준다. 은희가 만든 최악의 연극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영화는 결말을 열어두었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산뜻하다. 오랜만에 엔딩이 오래 기억에 남을 한국영화이다.
촬영이 정말 좋았다. 밤 장면을 제외하곤 야외장면에서 조명을 최대한 줄인 느낌인데, '최고의 조명은 자연광'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확인시켜준다. 늦여름에 맞은 최악의 하루가 아침 드라마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산뜻한 화면 때문이었다. 늦여름이라는 시간과 남산이라는 공간, 최악의 하루 끝에서 저 멀리 열려있는 해피엔딩을 소개받는 순간을 포착하는 카메라가 좋았다. 음악도 좋았고, 은희와 운철이 카페에서 대면하는 장면에서 등장한 ‘너의 의미’도 센스 있었다.
영화의 주역인 네 배우의 연기 모두 좋았지만, 극을 이끌어간 한예리를 제외하면 특별출연(이라 쓰고 사실상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희준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환상속의 그대>, <해무> 등에서 이미 한예리와 호흡을 맞춰봤기 때문일까, 옛 애인의 찌질함과 몰래 바람피운 상황이 맞물려 끊임없이 관객들이 키득거리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전사가 상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이희준의 표정과 말투에서 다 설명되어 버린다.
다만 초반의 늘어짐이 조금 아쉬웠다. 사실 이희준이 등장하기 전 까지의 전개는 예쁘게 찍은 홍상수영화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서촌과 남산이라는 배경, 서툰 영어로 대화하는 인물들, 길거리들까지 그런 느낌으로 가득했다. 권율과 이희준이 등장하며 <최악의 하루>만의 느낌을 찾아가지만 전반부가 어딘가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