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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23. 2020

2020-04-22

1. 오랜만에 실물로 구매한 씨네21의 "우리 시대의 시네필" 특집기사를 읽으며 내 방에 책장을 떠올렸다. 내 책장은 말 그대로 잡탕이다. "언제가 읽어야지"라는 생각으로 방치해둔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두 저작 [감독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맨살]과 함께 꽂혀 있고, 그 옆엔 태그 갤러거의 [존 포드]가 있다. 그 사이엔 또 주유신의 [시네페미니즘]과 퀴어 영화이론서 [호모, 펑크, 이반],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들이 있고, 이영재의 [아시아적 신체],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괴물],  그 사이사이엔 이런저런 페니미즘 이론서와 (역시나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하는) 레이 초우의 [원시적 열정] 등이 있고, 책장의 공간이 부족해 옆으로 뉘어져 쌓인  유운성의 평론집 [유령과 파수꾼들]과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 그리고 박찬욱과 이경미 영화의 각본집이 놓여 있다. 존 버거의 책들 사이엔 들뢰즈의 [시네마: 시간-이미지]가 있고, 영자원에서 출간한 핸드북이나 위경혜의 [광주극장] 같은 작은 책들이 책장 여기저기의 빈 공간을 패우고 있다. 한 챕터쯤 읽다가 꽂아둔 벽돌들(가령 [서양미술사]나 [계몽의 변증법], 하룬 파로키 전시 도록 등)도 한가득이다. 물론 가장 처음 떠오른 곳은 책장의 맨 아래인데, 여러 잡지들을 모아둔 곳이다. 이번에 산 씨네21을 비롯해 [마테리알], [아노], [오큘로], [세컨드], [프리즘오브], [무비 페미니즘], [필로], 영자원 기관지 [아카이브 프리즘], 그리고 전기가오리의 책들이 뒤섞여 있다. 그때그때 주워들은 책들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이는 대로 구매하고, 그때그때의 관심사에 따라 책을 사고, 별 다른 기준이나 순서 없이 읽는다. 사실 영화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자원이나 어떤 영화제의 특별전처럼 특정 주제를 가지고 영화들을 몰아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면 감상하는 작품도 제멋대로이다. 물론 영화를 보는 플랫폼도 제멋대로이다. 가령 지난 일주일 간의 나는 지인에게 받은 오부야시 노부히코와 존 포드 영화 파일을 노트북을 통해 봤고, 이어서 넷플릭스로 <커뮤니티>를 보다가, 왓챠플레이에서 <리애니메이터3>를, CGV에서 <건즈 아킴보>를, 씨네큐브에서 <낭트의 자코>를 각각 보고 플레이스테이션을 켜 블루레이로 <쉘부르의 우산>을 틀었다. 여기엔 일관된 취향도, 목적도, 주제도 없다. 그냥 별 생각없이 극장에선 틀어주는 영화를 보고, 노트북으로는 받아둔 영화를 보고, OTT서비스로는 업데이트된 영화를 본다. 어쩌면 이는 P2P나 토렌트 사이트 인기목록에 올라와 있는 영화를 문자 그대로 편견없이 주워먹던 학창시절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기사에 언급된 '선배 시네필'들의 영화 리스트를 챙겨보는데 집중하기 보단 별 재미도 없고 금새 잊어버리게 되는 싸구려 영화들의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게 내 취향이라면 취향인 것 같다.

2. 그러니까, 나는 영화사의 정전을 탐독하고 작가를 숭배한다는 의미에서의 시네필은 아니다. 어차피 기준은 거의 흐려졌다. '선배 시네필'의 모임장소인 극장과 시네마테크는 멀티플렉스와 OTT서비스, 토렌트와 데이터클라우드를 통해 폭파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2018년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복귀가 나를 포함한 여러 영화보는 지인들에게 공간의 해체를 가속화 시켰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제2의 정성일, 제2의 허문영을 찾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지 않나? 행여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배 시네필'이 지닌 권위를 상속받는 것에 불과하다. 씨네21의 기획이 정의하는 '밀레니얼 시네필'은 사실상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충 그려봐야 위와 같은 그림이 겨우 나오지 않을까? '밀레니얼 시네필'은 그 시작부터 각자였으며, 약간 혹은 잠시 겹칠 뿐 역시나 각자이다. ('우리'로 호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아서) 나/그들 공유하는 '선배'나 '정전'은 차라리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자막을 제작헤 시네스트에 올리는 이들과 그들이 자막을 제작해 올린 영화들에 가깝다. 게다가 나/그들 앞에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단일한 '시네마'라기 보단 눈 앞에 놓인 모든 스크린의 '무빙-이미지'이다. '시네마'라는 숭배경험은 사라지고 각자가 마주한 '무빙-이미지'의 경험을 통한 나/그들의 재료(영화, 드라마, 시트콤, 뉴스, 예능, 광고, 움짤, 게임, 트위터, 유튜브, 틱톡, OTT, 블랙박스 영상, 영상설치작업, 전광판, 트위치 등)만이 남는다. 차라리 '밀레니얼 시네필'이라는 호명보단, '잠시 만나고 다시 헤어지길 반복하는 무빙-이미지 필리아'라는 말을 제안하고 싶다.


3. 쉬운 글=쉬운 말로 쓰인 글=대중적인 글 이런 등식은 당연히 성립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만, (영화에 관심 있지만)영화글 혹은 비평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 마테리알, 오큘로, 아노 등을 읽었을 때 흥미로워 할 것이라는 생각은 잘 안 든다. 정경담 편집인이 말한 것처럼 협소하더라도 타깃이 확실한 글이 지금에선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글이 아닐까. 씨네21 대담에 참여한 마테리알, 아노, 세컨드, 인디즈 모두 삭자의 타깃 독자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많은 범위에서 겹치겠지만 또 많은 범위에서 나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필요한건 모두를 위한 글보단 각자를 위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쉬운 말만 나열하는 별 의미 없는 글들이 여러 플랫폼에서 마구 생산되고 있기도 하지만, 결국 독자는 각자가 원하는 글을 찾아가고 최근의 메일링 서비스들이 이를 어느정도 증명하지 않나 싶다. 결국 진입장벽을 낮춘다는 건 결국 진입로를 다양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의 한줌의 독자가 (여러 면에서)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장 큰 저널은 하향평준화되고, 수많은 창구는 그들을 지탱해줄 독자를 충분히 갖추거나, 수익모델을 발견하지 못하고, 필자의 수많큼 다양해진 창구 속에서 양질의 글과 필자를 찾는 것은 휴지더미 속에서 물티슈를 찾는 일에 가까워진다.


4. 요즘 생각하는 아이디어 몇 개.

씨네21에 실린 <1917>에 대한 비평 두 개와 <건즈 아킴보>를 보고, 영화에서 게임적 체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함께 <게이머>, <버드맨>, <하드코어 헨리>, <너브>, <레디 플레이어 원>, <쥬만지> 속편 시리즈, <주먹왕 랄프> 시리즈, <트론>, <둠>, <퓨쳐맨>, <쿵 퓨리>, <퀵>, <10억>, <조작된 도시>, <데스 스트랜딩>,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빅매치> 등의 영화와 드라마의 부스러기들을 긁어 모으고 싶다.

<엽문> 시리즈의 첫 영화가 <아이언맨> 1편과 같은 해에 제작된 것을 우연이 아니라 상정하고, 견자단이 출연한 몇몇 영화와 함께 '아시아적 신체'로서의 견자단-엽문을 이야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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