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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03. 2020

2020-05-03

1. <기생충> 흑백판을 봤고, 역시나 별로였다. 봉준호는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열린 대담에서 "김기영의 '하녀'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처럼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클래식들은 흑백이 많다"며 "이렇게 흑백으로 하면 왠지 나도 클래식에 포함될 것 같은 그런 즐거운 환상(이 든다)"고 말했다. 애초에 낮은 채도와 어두운 톤을 보여줬던 <마더>의 흑백판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기생충>의 흑백판은 기우의 집의 칙칙한 녹색톤과 연교의 집의 화사한 녹색톤의 대비를 삭제해버린다. 흑과 백의 대비로 치환된 상이한 녹색의 톤은 별 다른 효과를 얻지 못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흑백판은 영화가 지닌 운동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효과를 선보였다. 반면 <로건>의 흑백판은 절만만 그랬다. 그 절반은 영화가 유전자 변형 옥수수밭에 당도하기 이전까지 뉴멕시코의 국경지대 사막을 배경으로 할 때이다. 옥수수 밭과 후반부 숲의 녹색은 흑백으로 인해 묻혀버렸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흑백판에서도 가장 죽어버린 장면은 시타델의 '밭'이었다. 녹색은 흑백에서 생기를 잃는다. <기생충>의 흑백판은 그걸 잃어버렸다. 봉준호의 "클래식에 포함될 것 같은 환상"은 사실상 망상에 가깝다. 왜 그는 흑백영화를 만들지 않고 흑백판을 만드는가? 흑백 고전영화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시네필 감독에게 영화 본편을 흑백으로 만드는 것은 가당치 못한 행위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화면에 자신은 다가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2. https://www.nocutnews.co.kr/news/5280311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기생충>처럼 극단적인 계급 문제를 다룬 작품은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흑백 화면은 그러한 영화 성격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이안은 "<기생충>이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계급투쟁을 처절하게 그린 만큼 극단적인 명암을 필요로 한다고 감독들이 판단했을 수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기생충>만 봐도 흑백 화면은 반지하와 지하라는 밑바닥 세계 명암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 세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컬러 화면이 주는, 의도치 않은 밝고 아름다운 요소를 흑백 화면으로 제거할 수 있는 셈이다."  "가난과 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계급투쟁은 시대와 장소, 지역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범역사적"이라며 "<기생충> 흑백판은 특정 시대 환경을 재현한 컬러판의 한계를 넘어, 이러한 투쟁이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진리로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말 헛소리다. <기생충>의 흑백판은 <기생충>의 흥미로운 몇몇 제스처들을 흑백의 이분법에 가둬둔 채 공간의 이분법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애초에 영화에 부재했던 계급투쟁을 강화한다거나 '흑백'이라 얻을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말은 네이버 영화의 마케팅용 작업노트에나 써 있을 내용이다.


3. 사실 얼마 전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를 본 터라 <기생충> 흑백판의 단점들이 더 눈에 띠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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