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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01. 2020

2020-06-01

1. 주말동안 전주국제영화제와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본 영화들 정리

<이상한 나라의 펠릭스> 마리 로지에 2019
그간 게이 레슬러, 젠더를 바꾸고 싶어 하는 음악가  전형성 바깥의 인물을 다큐멘터리에 담아온 마리 로지에의 신작은 독일의 음악가 펠릭스 코빈의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뮤지션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는 보통 그들의 전기를 담아내거나, 공연 실황을 보여주고 투어에 동참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들의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이기팝과 스투지스를 다룬  자무쉬의 <김미 데인저>  벤더스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거장들의 영화도 넓은 의미에서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펠릭스> 여기서 다소 벗어나려 시도한다. 50 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펠릭스를 지켜봐도 관객은 그의 일상이나 생애를   없다. 관객은 단지 그가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모두를 사용하는 독일인 뮤지션이며, 마이크를 물에 넣거나 불에 태우는 것은 물론, 개가 마이크를 씹는 소음까지 음악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정도를 알게 된다. 마리 로지에가 보여주는 것은 펠릭스 코빈의 음악과 그것이 창작되는 과정뿐이다. 때문에  영화는 종종 펠릭스의 곡작업 과정이 포함된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이크를 불태우고 올빼미 앞에서 Korg MS-20 연주하는 펠릭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의 무작위적인 음악세계에 다가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영화는 즐거움을 준다.

<윌콕스> 드니 코테 2019
영화가 시작하면 여러 방랑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자막이 등장한다. 이들은 북미 대륙 곳곳을 떠돌며 미국과 캐나다의 공공시설의 혜택을 이용하고 밭에서 작물을 서리하거나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등의 방식으로 연명한다. 동시에 이들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 , , 나무, 건물을 스쳐지나가듯 바라보고, 잠시 그곳에 머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윌콕스> 주인공 윌콕스 또한 방랑자이다. 그는 캐나다의 어느 지역을 돌아다닌다. 그는 거대한 호박을  보트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나 ATV 타다가 어딘가에 걸려 고생하는 이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과수원의 사과를 서리하거나 마트에서 통조림을 훔치기도 한다. 거의 거처는 배낭에 메달린 텐트, 버려진 헛간, 기울어진  등이며, 그의 화장실은 자연이나 캠핌장의 공용화징실이다. 드니 코테의 카메라는 그의 뒤를 쫓아갈 뿐이다. 그런데 화면 한켠에는 어떤 잔상 혹은 빛번짐이라 부를 것이 등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햇빛이나 어딘가의 조명이 번진 것이기도 하지만, 종종 나무, , , 사람, 건축물 등의 형상을 담아낸다. 이러한 번진 이미지, 잔상 이미지는 자막  방랑자들의 삶과 윌콕스의 현재를 즉자적으로 연결한다. 표정 없는 망령처럼 캐나다 곳곳을 떠도는 윌콕스의 신체는  자체로 그의 선대 방랑자들이 현재화된 모습이다. 영화의 마지막, 버려진 미니버스에서 쉬다가 떠나던 윌콕스는 갑자기 버스를 뒤돌아 보고 울음을 터트린다. 표정이 없던 그의 얼굴에 드러난 유일한 감정이다. 화면이 암전되고, 미니버스 옆에서 생을 마감한  방랑자의 이야기가 자막으로 등장한다. 윌콕스의 울음은 사후적으로 정당화된다. 이는  영화가 제시하지 않았던 것을 윌콕스가 선제적으로 관객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드니 코테는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의 방랑자를 현재의 방랑자로 끌어오고, 방랑자의 리듬이라 부를  있을 법한 감각을 생성한다. 이는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들처럼 방랑자들이 등장하는 로드무비들이 지녔던 분명한 방향성과는 다른, 방향 없는 방랑의 리듬을 통해 과거의 방랑자들을 현재로 향하게 한다는 하나의 방향성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홀아비의 탱고와 뒤틀린 거울> 라울 루이즈, 발레리아 사르미앤토 1967, 2020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라울 루이즈의 장편 데뷔작으로, 미완성이었던 작품을 그의 아내이자 편집자인 발레리아 사르미앤토가 완성했다. 영화는  남자가 자살한 아내를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충격받았지만 어쨌든 생활을 이어가는 남자는 자꾸만 아내의 환영을 보게 된다. 간단한 줄거리를 지닌  영화는 러닝타임의 절반 지점에서 다시 뒤로 돌아간다. 단순히 이야기가 벌어지는 타임라인의 뒤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절반 지점까지 진행된 모든 숏이 되감기되며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미지는 물론 사운드 또한 거꾸로 재생되고, 중간중간 원래 방향으로 재생되는 내레이션이 등장한다. 부뉴엘 같은 초현실주의자 감독들의 영향이 느껴지는 (다소 지루한) 전반부와는 달리, 앞선 숏들을 되감는 기괴함이 주를 이루는 후반부가 인상적이다. 영화가 라울 루이즈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닌 그의 사후에 편집되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편집이 영화 형식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53년만에 도착한 기묘한 데뷔작이 주는 흥미로움이 있다.

<플레이백> 아구스티나 코메디 2019
오랜 독재정권이 끝난 1983, VHS기술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다. 아르헨티나의 퀴어 커뮤니티는 자신들의 드랙쇼를 VHS 기록한다. <플레이백> 그렇게 촬영된 VHS 영상들을 재편집한 파운드 푸티지다. 감독의 내레이션은 어딘가 침울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는다. 영상에 담긴 그의 친구들은 여러 이유로 세상을 떠났지만, 감독은 사양기술인 VHS 테이프의 영상을 붙잡고 재편집해 친구들을 다시금 불러 온다. 영화는 저화질에 지직거리고 종종 끊기기도 하는 과거의 영상을 편집해 다시금 재생한다. 이제는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VHS이지만, VHS  자체는 여러 카메라 앱의 필터를 통해 소환된다. 하지만 VHS 자체는 소환되지 않는다. 아구스티나 코메디는  자체를 소환하려한다. <플레이백> 단순히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추억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들이 물리적으로 기록된 매체를 꺼내어, 그것과 결합된 자신의 노스텔지어를 조심스레 드러내보이는 작업이다.

<괴물, 유령, 자유인> 홍지영 2020
 영화는 홍지영 감독의 단편 <스피노자의 편지> 비롯한  편의 단편을 엮은 모양새의 작품이다. 각각 '괴물', '유령', '자유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영화의  부분은, 사회에서 괴물처럼 다뤄지는 퀴어가 유령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들이 자유인이   있는 모습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영화의 기반에 깔고 있는 만큼 그의 말이 인용되기도 하고, 예언처럼 보이는 문구가 자막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배우인 성철은 스피노자를 연기하는 경험을 겪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유대인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 모두에서 버림받은, 양분화된 사회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홍지영 감독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상황을 퀴어적이라 진단하고,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퀴어의 삶을 그와 연결한다. 다만  형식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간 대다수의 퀴어영화가 감정에 몰입하였던 것과는 달리,  영화는 감정이 개입할 내러티브 자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계속해서 바뀌는 듯한 장면의 주인공, 금뿔유령과 같은 정체불명의 캐릭터의 등장, 감독으로 출연하는 홍지영 감독, 흑백과 컬러 화면의 사용, 내레이션 없이 자막으로만 등장하는 스피노자 등의  등을 활용한다. 앞서  편의 단편을 엮은 것과 같은 모양새라 했지만, 사실상  단편을 해체하고 다시 뒤섞은 모양새에 가깝기도 하다. 때문에 괴물->유령->자유인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흐름 보다는  테마가 뒤섞인 덩어리 자체를 보는 것만 같다. 영화의 시놉시스가 보여주는 접근법은 흥미롭지만,  결과물은 다소 난감하게 다가온다.

<2 40> 카이두 1975
<중복> 카이두 1974
<이화뉴스> 이화여자대학교 영화패 누에 1988
<영화운동의 함성> 이화여자대학교 영화패 누에 1989
인디다큐페스티발 20주년을 맞아 진행된 특별전에서 한국의 학생운동을 담은  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편은 한옥희를 중심으로 1970년대 초반 이화여대 학생들이 결성한 여성 실헙영화 집단 '카이두 클럽' 영화이며, 뒤의  편은 이화여대 영화패 누에가 기록영화 스타일로 제작한 작품이다. <2 40> 제목은 '통일을 염원하는 종소리의 여운'이며, 영화 또하 종소리에서 시작해 종소리에서 마무리된다.  사이는 분단  통일과 연관된 여러 이미지들이 몽타주된다. <중복> 애니메이션의 컷아웃 기법을 활용해 캔버스 위에 놓인 밧줄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밧줄 외에도 사람의 그림자, 우산, 축구공, 탁구 라켓 등이 등장하며, 강아지의 얼굴과 무더운 중복(中伏)날의 이미지가 인서트로 등장한다. 탯줄부터 생애라는 타임라인까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밧줄과 저속촬영된 거리의 사람들은 당대 한국 사회의 이미지 자체를 포착해내며, <2 40> 정치적 제스처보단 미학적 탐구에 집중한다.
누에패의 <이화뉴스> 1988 1학기에 학내에서 벌어진 행사들을 기록한 작품이다. 총학생회의 결성부터 대동제, 성고문 규탄 집회, 광주항쟁 8주기 연대집회, 87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연대집회 등이 시간순서대로 이어진다. 한국 학생운동의 정점이었던 80년대 말의 이대와 신촌의 풍경이 8mm 카메라에 담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아마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흐릿한 화질과 엇나간 초점 때문에 화면  인물 대부분의 얼굴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전경과 대치하며 화염병을 던지는 투쟁 현장에서 마스크를 쓰며 익명성을 확보하려 노력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흐릿해져 보이지 않는 익명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화인'이라는 호명 아래 모인 집단으로 가시화된다. 비록 학내 뉴스라는 형식을 담고 있지만, 이러한 화면이 2016년의 투쟁을 지켜봐왔던 입장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영화운동의 함성> 1980년대 초반부터 결성되기 시작한 대학  영화집단을 조명한 작품이다. 얄라셩, 소나기, 장산곶매, 바리터  한국 독립영화와 학생영화에  족적을 남긴 집단들이 등장하고, 홍기선, 변영주, 장윤현 등이 인터뷰이로 영화에 등장한다. 이는 단순히 30여년 전의 이들을 만나는 것을 넘어, 한국 영화의 어떤 순간을 만나는 경험이다. 농촌이나 공장노동자와의 연대를 위해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와 필름의 장단점을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영화를 통해 운동할  있을지 사유하고, 코스타 가브리스  해외 거장의 정치영화를 배급하는 등의 활동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당신의 사월> 주현숙 2019
세월호 참사 이후 5,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용기를 내었으며, 무기력해지고,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당신의 사월> 어쨌든 살아가고 있는, 세월호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이들의 트라우마를 살펴보고 그것이 극복되기 위한 조건을 모색한다. 영화는 청와대 인근 통인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 인천의 영어교사, 기록학과 학생, 진도에서 양식업을 하는 어부, '세월호 운동' 기록하는 미디어 운동가 등을 인터뷰하며, 각기 다른 직업, 나이, 위치에 놓인 이들이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받아내고 있는지 기록한다. '당신의 사월'이라는 제목은 2014 4 16일이 당신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영화   인터뷰이의 말처럼 어쩔  없이 다가오고 마는 세월호를 상기시키는 계기를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질문하고 있다. 동시에 영화의 영어제목인 'Yellow Ribbon' 5년에서  나아간, 나아갈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참사 발생 당시부터 2019년까지 다섯 인터뷰이가 어떻게 참사를 받아내었는가를 이야기한다면, 영화의 마지막은  이후를 이야기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잊지 않을 것인지, 진상규명은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정부  국가의 현재를 어떻게 전진시킬 것인지, 노란 리본은 그것을 위한 연대의 상징으로써 다섯 인터뷰이와 관객을 잇는다.

<혁명을 기념하며> 지가 베르토프 1918
지가 베르토프의  장편영화로 알려진 기록영화로, 11917 러시아 10월혁명 과정과  직후의 변화를 담고 있다. 그가 진행한 <주간 영화>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에 벌어진 역동적 변화를   있다. 2017 전체 필름이 발굴되었고 2018 복원  공개되었으며,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의 20주년 특별전을 통해 만나   있었다. 영화는 혁명의 내용이나 사상을 전파하는 것보단, 벌어진 사건을 연대기 순으로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1917 2월혁명 이후 레닌이나 트로츠키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러시아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케렌스키도 자주 등장한다. 트로츠키의 연설이 여러 차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마 무성영화이기에 이들의 연설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것을 자막으로 옮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베르토프의 카메라는 철저히 기록자의 입장에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의지의 승리> <올림피아> 같은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와도 다르다. <혁명을 기념하며> 혁명을 기록하고 기념한다. 그의 실험적인 걸작 <카메라를  사나이> 떠올린다면,  영화는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대신 영화는 당시 러시아 민중들에게 공유되었을 혁명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희생자들의 장례행렬에 러시아 민중들이 인간띠를 만들어 함께하는 모습과 같은 이미지는 특별한 실험 없이도 관객을 고취시키는, 기록하고 보여주는 것의  자체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다.

<해협> 오민욱 2019
영화는 타이난에 사는  여성의 편지로 시작한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Letters to Buriram'이다. 대만 타이난에 사는 여성은 태국 부리람에 사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타이난 인근에 위치한 화롄에서 지닌이 났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여성은 카메라를 들고 타이난을 찾은 한국인 남성과 진먼 섬에 가기로 한다. 진먼 섬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만 국군에게 포격을 가했었던 8.23포전이 벌어졌던 공간이다.  사람은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패  한국인 기자의 이름을 발견한다. 이제 영화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전쟁을 담아낸다. 중국과 대만, 일본과 미국, 남한과 북한, 조선과 일본, 영화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한국전쟁과 8.23포전, 그리고 임진왜란까지,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담아낸다. 그것은 대부분 전쟁이 벌어졌던  국가 사이에 위치한 해협을 찾아가고,  국가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해협> 이미 벌어진 전쟁들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유일한 판단은 동아시아 현대사를 전쟁으로 가득 채운 원흉인 '천황'이라는 존재를 내치지 못하는 일본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대신 전쟁에서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 8.23포전에서 사망한 한국인 기자부터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어뢰에 침몰한 여객선에 타고 있던 조선인, 한국전쟁에 참전한 해병 등의 이야기를 담는다. 아니, 이야기라기보단 2010년대 후반까지도 남아 있는  흔적들을 쫓아간다. 영화에 담긴 것은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레 전쟁을 겪은 개인들이다. 카메라는 망자들의 잔상을 찍고, 지진이라는 계기로 이를 떠올린 여성은  감정을 어머니에게 편지로 써내려간다. 영화에 부리람은  한번 나온다. 그것은 필름카메라로 촬영된 사진  장이다. 아무일도 벌어진  없는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네, 하지만 정지된 부리람의 모습은 망자들의 안식처와도 같은 곳으로 존재한다. 다소 느린 호흡으로, 영화가 무엇을 다루려는지 설명하지도 않은  진행되는 불친절한 영화지만, 그만큼의 시간 동안 해협을 떠도는 혼령과 마주하게 된다.

<할리퀸> 카롤리나 아드리아솔라, 호세 루이스 세풀베다 2019
칠레 최대의 빈민가 '바호스 데 메나'에 사는 카롤리나는 생존을 위해 사진과 비디오를 제작한다. 그는 더 많은 좋아요와 그에 따른 돈을 위해 '할리퀸'으로 분장하고 스트립쇼를 방송한다. 그에게 방송은 생계수단이다. 좁은 집에 살기에 어린 딸이 있는 앞에서도 방송을 준비해야하고, 미국의 어느 시청자는 대뜸 "창녀"라는 메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상황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카롤리나는 칠레에서 있었던 '페미사이드 반대 집회'에 딸과 함께 나가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자신을 "창녀"라 부른 미국인을 방송에 태그하여 그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가 잃지 않으려는 것은 그의 거의 유일한, 동시에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신인 몸이다. 그가 집회에 나가고 경연을 위해 폴댄스를 연습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임을 인식하는 행위와도 같다. 막연히 '할리퀸'이라는 외양 때문에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 할리퀸 캐릭터의 변화를 떠올렸다. 전작에서 관음의 대상으로 기능했던 할리퀸은 외모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몸과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방식을 맞이하고 그것을 즐긴다. 다큐멘터리 <할리퀸>은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다. 변화보단 원래 그렇게 살아오던 카롤리나의 삶을 가능한 담아내는 것에 집중한다. 그의 삶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별개의 삶이 붙어있는 것이 아닌, 생존 및 그의 몸과 연결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새 남편과 결혼한 카롤리나 앞에 전 남편이 나타나 행패를 부린다. 어쩔줄 몰라 하는 카롤리나 대신 옆에 서 있던 새 남편이 전 남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전 남편은 쓰러져 기절한다. 카메라는 카롤리나를 따라가는 대신 기절한 남자를 비춘다. <할리퀸>은 그러한 방식으로 공간과 상황이 내포한 폭력에서 여성의 위치를 보여준다.


2. 전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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