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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04. 2020

2020-06-04

전주국제영화제, 유튜브 We Are One 영화제, 그 밖에 본 영화들 기록.

<크레이지 월드> I.G.G. 나브와나

우간다의 '영화공동체' 와칼리우드의 신작이다. 유튜브를 통해 진행되는 온라인 영화제 'We Are One'을 통해 관람했다. 지난 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쇼 브라더스의 쿵푸 신드롬>(Iron Fists and Kung Fu Kicks)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던 그 영화이다. 와칼리우드는 2010년 <누가 캡틴 알렉스를 죽였는가?>를 시작으로 다양한 액션영화를 오마주하고 패러디하며, 그 범위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장 클로드 반담 등 소위 '하드 보디' 액션 스타들의 영화부터 60~80년대 홍콩 쿵푸/무협영화까지를 포괄한다. <크레이지 월드>는 그 중 '쿵푸'에 집중한다. 전직 코만도인 주인공의 딸을 비롯한 아이들이 마피아들에게 납치되었지만, 알고보니 이 아이들은 쿵푸마스터였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은 이러한 맥락에서 출발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감독인 I.G.G. 나브와나와 와칼리우드 멤버들이 인사말을 건네고, 극 중간에 <에볼라 헌터> 등 이들의 전작이 갑작스레 삽입된다던가, MC라 불리는 내레이터가 끊임없이 추임새를 넣고, 심지어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관객(제작자인 알란이 출연했다)을 찾아가기도 한다. 다소 난잡한 구성이지만, 여기엔 이들이 10년 간 쌓아온 팬들에 대한 팬서비스는 물론, 비합법적 경로를 통해 우간다에 들어온 세계 각국의 액션영화 클리셰가 중첩되며 형성된 기묘한 리듬이 담겨 있다. 이들의 전작들을 봤던 관객이라면 조금 더 숙련된 카메라 등이 눈에 띨 것이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스턴트맨도 없고, 총부터 헬리콥터까지 모든 소품을 자체제작하는 상황이지만, 이들은 그 동안 보아온 영화를 통해 영화를 학습하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한다. <크레이지 월드>는 팬서비스가 다소 넘치고 이들이 스스로를 밈으로 사용한다는 인상이 강하지만, 여전히 스스로 즐기기 위한 영화를 제작한다는 활력이 이들의 동력임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죽음의 무도, 해골 그리고 환상들> 피에르 레온, 히타 아세베도 고메스, 장 루이 쉐퍼 2019

"‘죽음의 무도’가 민간 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세를 지나 15세기 유럽 근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면?"이라는 프랑스의 이론가 장 루이 쉐퍼의 가설에서 출발한 영화는 프랑스와 포르투갈 곳곳을 누비며 그와의 대화를 담고 있다. 영화는 고대 암각화부터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회화, 디즈니의 해골 애니메이션이나 미조구치 겐지, 루이스 부뉴엘을 거쳐 버지니아 울프로 마무리되는 대화의 여정을 보여준다. 관객은 장 루이 쉐퍼와의 대화를 지켜보는 토크쇼의 청중처럼 자리한다. 하지만 영화는 죽음의 무도와 연관된 쉐퍼의 가설을 입증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것이 15세기 유럽 근세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기표라는 것은 영화의 중심에 위치하지만, 쉐퍼와 다른 두 감독(혹은 관객)이 나누는 대화의 중심은 아니다. 도리어 이들의 대화를 바탕으로 소환되는 벽화, 회화, 영화, 음악, 소설의 기표들이 주는 우연한 만남이 영화를 채운다. 쉐퍼의 가설은 이 영화의 맥거핀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역사가 우연히 만난 기표들의 몽타주라는 사실에 가깝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리모트 대작전> 우에다 신이치로 2020

전작을 통해 대성공을 거뒀던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이 코로나19 국면을 맞아 전작의 배우 및 스탭들과 비대면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전작과 그것의 스핀오프였던 <할리우드 대작전>과 마찬가지로, '비대면 영화'를 제작해달라는 방송사의 요구를 받은 히구라시 감독이 영화제작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의문의 범죄를 추적하는 가상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연쇄 간지럼마'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한다. 스탭과 배우, 감독이 모두 각자의 집에 격리된 상태에서 각기 촬영한 장면을 편집해 만든 조약한 영화가 탄생한다. 다른 장소에 위치한 두 배우는 흰 장갑을 낀 손이라는 기표에 의해 같은 장소에 있는 것으로 연결되고, SNS를 통해 공모한 관객들의 영상들이 영화에 삽입된다. '연쇄 간지럼마'의 첫 타깃이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을 촬영하는 방식(물론 비대면이라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에서 오는 불쾌감이 존재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영화를 제작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겠다는 의지가 앞서는 작품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영화 만들기 같은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는 데 의의가 있다기 보단, 어떻게든 무엇인가 만들어보겠다는 의지의 산물로써 더욱 가치가 느껴진달까. 영화는 유튜브를 통해 무료로 공개되었으며 한글자막도 지원된다.

<사라예보의 다리들> 장 뤽 고다르, 세르게이 로즈니차 외 11인 2014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과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는 옴니버스 영화로, 유럽 감독 열 세명이 참여했다. 'We Are One' 영화제를 통해 관람했다. 사실 영자막으로 보느라 대부분의 세그먼트는 잘 기억나지 않고, 대사가 없던 로즈니차의 세그먼트와 한글자막 버전이 유튜브에 별도로 올라와 있던 고다르의 세그먼트만 기억난다... 로즈니차의 세그먼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비롯해 암살사건의 관련된 인물 및 1차대전의 참전 병사 사진과 함께 움직이는 풍경을 중첩시켜 보여준다. 흑백으로 구성된 화면에서 정지된 인물 사진과 움직이는 풍경 영상이 중첩되는 광경은 오래된 역사 내지는 누군가의 기억을 겹치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역사, 과거를 지금으로 끌어와 재해석한다는 측면에서 로즈니차의 세그먼트는 영화의 기획의 중심적인 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로즈니차 직전에 나온 고다르의 세그먼트는 <영화의 역사(들)>부터 <이미지 북>에 이르는 그의 후기작들과 유사한 구성을 취한다. 다양한 이미지 들을 채집하고, 굵고 강렬한 색채의 텍스트와 고다르의 내레이션을 덧붙이는 방식. 1차대전 뿐 아니라 현대의 여러 전쟁 이미지와 회화, 보도 사진과 영상 등을 접붙이는 고다르는 총격 소리와 종군기자의 카메라 이미지를 병치시키는 등 관적인 이미지/사운드 몽타주로 전쟁을 상기시킨다. 그가 상기시키는 전쟁은 1차대전뿐 아니라, <이미지 북>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지금에도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포괄하고 있다. "전쟁을 보도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정신적인 사람이 아니다"라는 그의 내레이션처럼, 그 중심에는 전쟁의 이미지를 포착, 아니 탈취하고 운용하는 이들이 놓여 있다. 고다르는 이 사실을 계속 상기시킨다.

<티켓 오브 노 리턴> 울리케 오팅거 1979

한 여성이 베를린 공항에 도착한다. 그는 편도 티켓을 끊었다.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신다. 그의 손에는 거의 항상 술잔이나 술잔이 들려 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보며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리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매끄럽게 구획된 공항이라는 공간에 익명에 가까운 타자가 나타나고, 갈 곳 없는 그는 공간 곳곳을 돌아다닌다. 두 영화의 차이점이라면, <플레이타임>의 윌로씨는 체계적인 도시의 무질서라는 역설 속으로 들어오는 인물이라면, <티켓 오브 노 리턴>의 여성은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정말로 그렇다. 그가 지나가는 길 앞에선 많은 것이 쏟아지고 부셔진다. 공항에선 누군가의 짐가방이 열려 짐이 쏟아지고, 유리창이나 거울에 술을 쏟아버리고, 다 마시고 난 술잔은 떨어져 깨진다. 그는 술취한, 폭음하는 여성이기에 종종 제제당하기도 한다. 쇼핑카트에 짐을 싣고 어딘가로 이동하던 여성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기도, 상류층으로 보이는 이들의 선상 파티에서도 술을 마시기도 하는 익명의 여성은 어떤 대사도 없이 베를린 곳곳을 돌아다닌다. 폭음하는 익명의 타자는 익명에 가까운 공간, 바, 길거리, 공원, 누군가의 집 등에 무질서를 가함으로써 익명의 공간들로 구성된 대도시 공간의 익명성을 깨트린다. 각 공간들의 간판이나 표지판은 그 공간에 이름이 있음을 알려주지만, 이 사실은 간과되고 그곳은 그곳을 통칭하는 바, 공원, 길거리 등의 이름으로만 남는다. 타자의 등장은 그 공간에 균열을 가져온다. 그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거울로 둘러쌓인 어느 공간에 힐을 신고 들어가 바닥의 거울을 부시는 영화의 마지막 숏은, 마치 거울처럼 서로의 익명성을 담보하는 공간들에 일어난 균열을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대한 작별> 세르게이 로즈니차 2019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신작은 스탈린의 장례식을 담는다. 내레이션 없이 당시 촬영된 자료화면들을 편집한 이 영화는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는 방송을 듣는 소련 인민, 스탈린의 장례행렬, 여러 인물들의 추도사 등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뒤 스탈린의 악행을 알리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에서 대규모의 숙청과 학살을 자행한 '조지아의 인간 백정' 스탈린의 죽음에 반응하는 소련 인민의 표정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그의 장례식에 참여해 눈물을 보이는 수많은 이들이 있으며, 그의 사망 소식을 무표정하게 듣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추모사를 읊으며 격앙된 표정을 보여주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개중에는 스탈린의 강압적인 이주정책에 따라 주거지를 옮겼어야 했던 고려인들의 얼굴도 보인다. 컬러와 흑백을 오가는 자료화면 속에서, 시체가 된 스탈린의 모습을 생생한 컬러로 목격한다는 것은 꽤나 생소한 경험이다. 때마침 관람한 지가 베르토프의 <혁명을 기념하며>은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을 기념하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마침내 건설한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을 보여주려 했다. 스탈린은 그 이념을 배반한, 혹은 체제가 내포한 결점을 극대화한 인물이었다. 로즈니차는 그러한 인물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의 표정을 보여주며, 스탈린 체제가 쌓아올린 공허한 스펙터클을 폭로한다. <혁명을 기념하며>에서 지가 베르토프가 보여준 표정들은 다양한 무표정의 공허로 변화한다. 어쩌면 <위대한 작별>은 레니 리펜슈탈이 보여준 파시즘 독재 스펙터클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별유예> 조혜영 2020

영화는 천장에서 시작한다. 감독이 사는 집은 네모나지도 않고, 천장엔 누수의 흔적이 가득하고, 좁은 창을 통해 검지손가락만한 한강이 보이는 곳이다. 감독은 그러한 집이 서울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비슷하고, 자신의 삶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전주에 있는 본가와 부모님 및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온다. 영화는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대신 자막을 통해 내용을 전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자막이 감독이 처음 제작한 영상이 담긴 8mm 테이프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는 점이다. 집이나 방이라는 물질적 토대나 전주와 서울이라는 공간의 위상에 대한 고민은 그가 처음 제작한 영상이 담긴 테이프라는 물질적 기록을 제거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동시에 이는 기록의 행위가 된다. <이별유예>는 그 결과물이다. 가족의 내적인 이유와 공간이라는 외적인 이유가 뒤섞인 이별이 상황을 마주하는 감독은 그것을 유예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을 유예할 수 있는 것인가? 불가역적으로 다가오는 이별을 유예시키는 방법은 그 순간을 기록하는 것임을 감독은 즉물적으로 깨닫는다. 그가 남한 곳곳을 떠도는 트럭 운전수 아버지에게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건네주고, 무엇인가를 기록해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8mm 테이프에 구멍을 뚫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과 닮았다. 이별이 집이라는 물질적 토대에 연관된 것이라면, 그것을 유예하는 방법은 물질적인 기록을 통해 기억을 연장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별유예>는 작품이 보여주는 내적인 방식으로도, 결과물인 작품으로도, 그러한 유예의 방식을 담아낸다.

<우주의 끝> 한병아 2020

영화는 시한부 진단을 받은 여성의 귀갓길을 따라간다. 곧 마주할 죽음에 대한 물음은 삶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토끼, 여우, 강아지 등으로 표현된 파스텔 톤의 이미지는 사뭇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중화시키고, 곳곳에 배치된 유머는 무거운 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찌른다. 주인공의 귀갓길은 그 종착지가 집이든 죽음이든, 어떤 '끝'을 향한다. "우주의 끝은 어디야?"라는 아들의 질문은 결국 그 끝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달렸다는 대답에 이른다. 맥주 안주로 오징어를 씹던 주인공은 실수로 혀를 깨문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수단. 아픔을 느끼는 주인공은 시덥잖은 사건과 이야기 속에 어쨌든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되새김질한다. '우주의 끝'은 정하기 나름이라지만, 그 끝이 어떻게 찾아올지는 알 수 없으며 언젠가 다가올 그 끝과는 상관없이 살아 있는 지금을 감각하기. <우주의 끝>은 결국 그 살아 있음에 관한 이야기 같다.

<무협은 이제 관뒀어> 장형윤 2020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마왕의 딸 이리샤> 등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장형윤 감독의 첫 실사 극영화이다. 대대로 계승되어 온 청명검의 주인 진영영이 무협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삶을 살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며 벌어지는 일을 담아낸다. 여기서 무협이라는 장르는 배경에 불과하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무협이라는 오래된 세계관을 현대로 끌어올 때 벌어지는 위화감으로 인핸 코미디에 가깝다. 장편영화 <이장>에서 큰아버지와 막내조카로 만났던 유순웅과 곽민규가 사부와 제자 관계로 출연하여 주는 웃음이 존재하지만, 그 밖에는 대학 생활을 다룬 여러 콘텐츠에서 봐왔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치즈 인 더 트랩>에서 기묘한 대학 생활을 만들기 위해 등장했던 유정과 백인호의 이야기가 이 영화에선 무협으로 대체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소소한 웃음은 존재하지만, 그조차도 관습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아쉽다.

<유통기한> 유준민 2020

동네 마트에서 일하는 지숙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어린 남매에게 전해준다. 이로 인해 마트에 민원이 들어오고, 친한 동료가 해고 위기에 놓인다. 동시에 남매의 어머니는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를 되묻는다. 스스로도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인 지숙은 고민에 빠진다. 영화는 유연함이 허락되지 않는 노동환경과 개인의 내적 갈등을 엮어 보여준다. 유통기한이라는 소재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폐기되는, 하지만 먹을 수는 있는 음식을 표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모종의 유통기한이 있음을 영화는 암시한다. 하지만 유통기한은 결국 어떤 쓸모를 판정하는 기준점이다. 그 쓸모가 단순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멸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쓸모가 소멸한 이후에도 남은 쓸모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인지, 영화 안에서는 불분명하다. 때문에 영화가 전달하려는 노동문제는 뚜렷이 전달되지만, 그것을 지숙이 겪는 내적인 문제와 엮어가는 과정은 다소 불분명하게 다가온다.

<레드> 미시마 유키코 2019

상류층 집안의 남편, 예쁜 딸과 큰 저택에서 살아가는 주부 토코의 삶은 얼핏 완벽해보이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그 삶은 건조하고 공허하며 폭력적이다. 토코는 우연히 만난 10년 전의 사랑 구라타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건축 일을 다시 시작한다. 집에 구속되었던 토코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러한 시놉시스를 본다면 어떤 탈주의 과정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레드>는 그것에 완전히 실패한다. 구원자처럼 등장한 남성에 의해 착취당하는 자신의 삶에서 탈주한다는 영화의 줄거리에서 토코라는 인물은 수동적으로 이곳과 저곳을 오간다. 이는 영화 전개의 편의에 따라 등장하거나 갑자기 언급되지 않는 토코의 집과 딸(그리고 시어머니), 건축 사무소 상사 등의 공간과 인물은 토코의 여정을 강조한다기 보단 무의미하게 만든다. 카호, 츠마부키 사토시, 에모토 타스쿠 등 일본의 좋은 배우들이 여럿 출연함에도 주여진 역할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말과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 속에서 토코는 영화의 기획이 목표했던 것을 향해 옮겨질 뿐, 그가 욕망하는 것은 단편적인 기표들로 등장하고 사라질 뿐이다.

<Genius Party: Happy Machine> 유아사 마사아키 2007

후쿠시마 아츠코, 카와모리 쇼지, 키무라 신지, 후쿠야마 요지, 니무라 히데키, 와타나베 신이치로 등 7명이 모여 제작한 옴니버스 중 유아사 마사아키가 연출한 세그먼트로, 'We Are One' 영화제를 통해 관람했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보우의 침실과도 같은 공간에서 깨어난 아기가 주인공이다. 침대 위의 모빌을 바라보다 깨어난 아기는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이 풍선 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방 밖으로 나가려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방 밖으로 나간 아기는 이상한 생명체들을 만나고, 자신을 쫓아다니던 한 생명체가 거대한 식충식물 속으로 스스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알 수 없는 공간을 떠돌던 아기는 어느덧 노인이 되고, 노인은 자신이 빠져나온 방 밑에 위치한 사람 모양의 틀 속으로 들어간다. 방의 게이지가 다시 차고, 새로운 아기가 나타난다. 얼핏 유아사 마사아키가 연출한 <어드벤처 타임>의 'Food Chain' 에피소드가 연상된다.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어딘가를 여행하던 핀과 제이크가 갑자기 다양한 종으로 변화하며 순환하는 세계를 경험한다. 이 영화의 아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태초의 지구인지, 어떤 외계나 이세계인지 알 수 없는 곳을 매메이며 노인이 된다. 심지어 한쪽 다리와 팔은 의수와 의족으로 대체된다. 이 세계의 정체는 무엇이며 아기는 노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 동안 왜 이 세계에 순응하는가? 생각해보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나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도, 최근작인 <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에서도 일종의 순환구조를 이루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그 세계에 단순히 순응하기만 하지 않는다. 순환은 이들이 세계의 규칙을 대면하고 대항하면서 가능해진다. 검은 머리 아가씨는 술자리와 축제의 규율 주변으로 나아가고, 카이는 할아버지의 조언 대신 인어 루와의 협동을 꾀하며, 히나코는 모두의 조언을 무시하고 죽은 미나토를 찾는다. 노인이 된 아기의 대체된 팔과 다리 또한 그러한 대항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서 세계를 순환하게 하는 것은 장기간 유지되던 무엇인가에 대적하려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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