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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06. 2020

2020-06-06

1.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120호 리뷰 코너에 이길보라 감독 <기억의 전쟁> 리뷰를 실었다.

https://actmediact.tistory.com/1479

2. 전주 국제 방구석 영화제는 장편 11편, 단편 5편으로 마무리. We Are One 유튜브 영화제는 장편 5편과 단편 2편을 봤고, 주말에 단편 몇 개 더 볼지도. 리산드로 알론소 <무제(세라에게 보내는 편지)>랑 마츠이 다이고 <아이스크림과 빗방울>은 보긴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다...

<미끼> 마크 젠킨 2019

영화는 영국의 어느 작은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어부인 마크는 어릴적에 살던 집을 새로 이사 온 외지인에게 판다. 어부라지만 제대로 된 배도 없는 그는 낚시를 하며 간간히 살아간다. 그러던 중 마크는 자신의 옛 집을 가게 되고, 그 집을 완전히 새로운 인테리어로 바꿔 자신의 가족이 살던 흔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게다가 바다 앞에 있는 그 집은 마크가 낚시하러 가기 위해 주차하던 집 앞의 공간을 관광객을 위한 유료주차장으로 바꾼다. 마크는 이들과 갈등한다. 이야기 자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다루는 익숙한 줄거리로 보인다. 하지만 <미끼>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필름의 거친 그레인을 노출하고, 종종 잘못 현상된 듯 음영이 뒤바뀌어 보이기도 하며, 후시녹음된 대사는 인물과 다소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드레이어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얼굴 클로즈업들의 연쇄는 격렬하게 대립하는 마크와 외지인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요소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소재에도 적절하게 작용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사양된 매체처럼 여겨지는 필름의 물질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마크와 외지인의 대립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필름의 마지막 저항이며, 마크 젠킨은 필름의 물질성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를 이야기한다. 필름의 긁힌 자국이나 반전된 음영은 지금의 디지털 영화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고서야 볼 수 없는, 필름의 고유한 화학적, 물리적 특성이다. 물론 필름을 예찬하는 영화들은 차고 넘친다. PTA나 놀란, 타란티노 같은 필름 애호가들은 파산 직전의 코닥을 살려내기까지 했다. <미끼>를 그러한 시도의 일부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6mm의 질감을 활용하는 방식과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동시대적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미끼>는 독특한 성취를 취한다. 

<쉬라즈> 프란츠 오스텐 1928

'We Are One' 영화제에서 BFI 복원판으로 상영되었다. 독일인인 프란츠 오스텐이 모든 시퀀스를 인도에서, 모든 배우를 인도인으로 캐스팅하여 촬영한 작품이다. 영화는 타지마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타지마할을 세워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린 샤 자한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고아인 뭄타즈 마할의 어린 시절, 그를 키운 상인의 아들 쉬라즈와의 짝사랑에서 시작되며, 타지마할이 건설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쉬라즈와 뭄타즈 마할의 사랑 이야기가 이들의 생애 전체를 걸쳐 펼쳐진다. 감독만 독일인일 뿐, 인도를 배경으로 인도 배우들이 출연하는 시대극이라는 점에서 <쉬라즈>는 독특한 위치에 놓인다. 특히 프란츠 오스텐은 무성영화 시기 부처의 삶을 다룬 <아시아의 빛>, 인도 마하바라타 신화를 소재로 한 <주사위 던지기> 등 꾸준히 인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연출했다. 종종 프리츠 랑의 영향이 느껴지는 화면구성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의 작품을 통해, 90여년 전의 인도를 본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다.

<이사도라의 아이들> 다미앙 매니블 2019

1910년대에 활동하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은 사고로 두 아이를 잃은 뒤 '엄마'라는 무용을 창작한다. 다미앙 매니블의 영화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현재 네 명의 여성이 이사도라의 무용을 접하고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들이 무용을 각기 해석하는 방식은 다르다. 첫 번째 여성은 이사도라의 무용이 담긴 무보(무용 악보)를 보고 그것을 가능한 똑같이 재현하려 한다. 선생과 제자 관계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여성은 함께 이사도라의 무용을 재현하려 한다. 하나의 워크숍처럼 이사도라의 동작을 익혀가는 이들의 대화와 몸짓에서 무용에 대한 관점과 이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마지막은 '엄마' 공연을 관람한 어느 관객이다. 몸이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고 집에 돌아간 그는 그 날 관람했을 무용을 어설프면서도 주의깊게 따라한다. 무용은 비록 무보가 존재하지만,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들은 언제나 같은 소리를 내며, 그것을 연주하는 뉘앙스, 세기, 속도 등에 따라 악보는 재해석된다. 반면 무용은 신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신체는 악기처럼 일정하지 않다. 무보는 한 세기 전의 무용을 전달하지만, 무보를 보고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몸은 언제나 다르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무용을 펼치는 때에 따라 다르다. <이사도라의 아이들>은 네 사람의 다른 제스쳐들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전문 무용수의 움직임은 다운중후군을 앓는 소녀 무용수의 움직임으로, 그리고 다시 이들의 공연을 관람한 노년 여성의 몸으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움직임이 공유하는 것은 아이들을 감싸는듯한 이사도라의 동작이다. 이사도라가 활동하던 시기와 한 세기의 시차를 지닌 이들을, 영화는 이사도라의 아이들로 명명하고 이들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각자의 동작이 지닌 세세한 차이들로 전달되는 이사도라의 동작은, 미세하게 변주되며 모두를 감싸는 제스쳐로 변화한다. 

<와일드 구스 레이크> 댜오 이난 2019

실수로 경찰을 살해한 뒤 경찰과 조직 모두에게 쫓기게 된 바이크 조직원 쩐웅 저우는 휴양지인 '와일드 구스 레이크'로 향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도우러 왔다는 의문의 여성을 만난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익숙한 중화권 누아르 영화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보다보면 80년대의 오우삼부터 왕가위까지, 홍콩 감독들의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동시에 풀숲에서 등장하는 호랑이 등의 동물을 클로즈업한 숏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을, 바이크 조직이 모인 장면에서는 떼거지로 몰린 이들이 급작스레 움직이게 되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액션 영화들이 떠올리기도 한다. 중국의 지방 소도시를 찾은 고독한 남성이 의문의 여성을 만난다는 점에서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비간이 히치콕이나 타르코프스키등을 영화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면, 댜오 이난은 홍콩 누아르나 지아 장커, 아핏차퐁 등 아시아 영화의 영향을 조금 더 짙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폭력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댜오 이난은 홍콩을 포함하는 동남아시아 영화들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후반부 쩐웅 저우가 아파트에서 탈출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의 초반 총격전을 연상시키는 구도가 등장하고, 우산을 사용한 액션이 등장한다. 바이크를 운전하던 사람이 지게차에 부딪혀 머리가 잘리는 등 뜻밖의 고어한 장면은 차라리 미이케 다카시 같은 일본 장르영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과잉된 장면도 등장한다. 네온사인 불빛을 강조하려는 시도는 LED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의 길거리 군무와 이동이라는 과잉된 이미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과잉에 가까운 이 영화의 이미지는 단순한 스타일의 과시를 넘어 붕 뜬 것과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와일드 구스 레이크'라는 지역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익숙한 중국의 도시들에서 벗어난,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이 공간은 사회적 균열로 인해 독립된 공간으로 분절된 어떤 곳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구 최후의 밤> 후반부 롱테이크에 등장하는 그 공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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