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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14. 2020

<전망 좋은 방> 제임스 아이보리 1985

 루시(헬레나 본햄 카터)는 사촌 샬롯(매기 스미스)과 함께 피렌체로 여행을 가지만, 약속과는 달리 호텔 방의 창 밖은 전망이 좋지 못하다. 다른 투숙객과 함께 먹는 식사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식사 자리에서 만난 몽상가적 성격의 조지(줄리안 샌즈)는 자신과 아버지가 머무는 전망 좋은 방을 양보해주겠다고 말한다. 피렌체에서 이런저런 시간을 보내고 영국으로 돌아온 루시는 교양이 흘러넘치는 보수적인 남성 세실(다니엘 데이 루이스)과 약혼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조지의 아버지가 루시의 집 근처로 이사 오게 되며 다시 만나게 된다. <모리스>, <하워즈 엔드> 등 E.M. 포스터의 소설을 꾸준히 영화화해온 제임스 아이보리의 <전망 좋은 방>은 문학을 영화로 번역하는 것에 있어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느껴진다. 우선 원작의 여러 챕터들이 거의 그대로 영화에도 이식되어 있다. 또한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많은 영화들이 120분 내외의 러닝타임에 방대한 내용을 담아내지 못해 이야기의 뼈대만 남겨버리는 것과는 달리, 루시, 조지, 세실을 두고 벌어지는 영화의 중심 내용 밖에 위치한 조연들에게도 상당한 러닝타임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문학을 영화로 번역하는 것에서 피상적인 부분에 머무른다. 이는 단순히 원작에 있는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117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장편영화보단 그것을 훨씬 초과하는 수백 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초장편영화나 TV드라마가 더 알맞은 형식일 수도 있다. 문학이 만들어내는 상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이미지는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다. 극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입장에서, 고정된 영화를 벗어나는 길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거나 눈을 감고 잠시 잠들었다 깨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는 영화 바깥에 위치한 방법으로 영화를 (일종의) 재구성하는 것이지,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는 출판된 소설처럼 완결된 무언가이다. 그 완결된 무언가는 고정된 이미지로 관객의 눈에 입력된다. 결국 문학을 번역한 영화는 문학이 그리는 이미지와 영화가 담아낸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목적이다. 

 <전망 좋은 방>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사뭇 흥미롭다. 영화엔 루시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한다. 첫 장면에서 루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을 연주한다. 어설픈 솜씨로 베토벤을 연주하는 루시를 본 비브 목사(사이먼 캘로우)는 박수를 보낸다. 이 장면 이후에도 루시는 여러 차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지만, 베토벤을 연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브 목사는 에머슨 부자를 비롯한 이들에게 루시를 “베토벤을 연주하려는 사람”이라며, 루시가 지닌 격정을 강조한다. 영화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루시의 격정은 고정된 이미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루시가 베토벤을 연주하는 장면,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비브 목사의 말로써 등장할 뿐이다. 두 장면은 영화 전체에 떠돌며 루시의 감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관객은 루시의 거의 모든 얼굴에서 격정을 읽어낼 수 있다. 헬레나 본햄 카터의 훌륭한 연기는 루시의 얼굴이 무표정이든, 미소이든, 일그러짐이든, 그 속에 숨겨진 격정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이는 E.M. 포스터의 소설을 읽으며 루시의 내면을 쫓아가는 독자가 떠올리는 것과 유사한 이미지이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그것을 직접 보여주는 것을 자제하고, 영화 전체에 환류하는 확정되지 않은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이는 똑같이 E.M. 포스터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 <모리스>가 ‘클라이브’라는 절대적인 이미지의 존재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것과 다른 방법이다. 이를 통해, <전망 좋은 방>은 원작의 내용을 성실하게 영상화하면서도 문학의 이미지가 지향하는 바를 쫓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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