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29. 2020

<야구소녀> 최윤태 2019

 주수인(이주영)은 고등학교 야구부 최초의 여성 선수이다. 그는 프로 야구선수로 진출하여 KBO 리그에서 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수인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야구를 해온 정호(곽동연)가 스카우터에 의해 드래프트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수인의 엄마 해숙(염혜란)은 수인이 야구에만 몰두하는 것이 탐탁지 않다. 그러던 중 야구부에 새로 부임해 온 코치 진태(이준혁) 또한 수인에게 프로리그에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수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을 던진다. 진태는 강속구로만 승부를 보려던 수인에게 “투수는 빠른 공을 던지는 것보단 타자가 공을 못 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말하며, 너클볼을 던져볼 것을 제안한다. 수인은 진태와 함께 훈련에 돌입한다. 최윤태의 장편 데뷔작 <야구소녀>는 시속 130km의 공을 던지지만 프로선수가 되기엔 역부족인 한 프로야구선수 지망생의 이야기를 다룬다. 

 <야구소녀>는 스포츠영화, 성장영화의 전형적인 틀을 따라간다. 운동선수인 주인공이 어떤 장벽을 맞닥뜨리고, 그러한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다면 <야구소녀>는 여느 스포츠영화와는 다르게,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강조하지 않는다.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은 패배감에 휩싸여 있다. 수인은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하지만, 여자는 체격/체력의 조건 때문에 프로선수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심지어 진태의 지인인 스카우터는 “쟤가 야구선수로 보이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한편 진태는 프로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지도자가 되기 위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타이밍도 놓쳐 버린 사람이다. 수인의 아빠 귀남(송영규)은 공인중개사 시험에 매달리지만 빈번히 실패하지만 한다. 이는 프로리그 진출이 확정된 정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카우터에 의해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그의 표정은 언제나 불안해 보인다. 종종 수인과 만나 시간을 보내는 아이돌 지망생 방글(주해은)은 빈번히 오디션에서 탈락한다. 해숙 또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하고 싶었던 어떤 것을 포기한 인물이다. 

 이들은 각자의 패배감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한다. 영화 전반부의 진태는 자신의 실패를 수인이 반복할 것이라 여긴다. 해숙은 자신이 하지 못한 도전을 남편 귀남이 지속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수인에게 반사한다. 정호는 자신이 프로리그에 진출한다는 소식에 대해 기뻐하기보단 수인이 정당한 평가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지에 불안을 느낀다. 여기서의 패배감은 수인을 비롯한 이들의 동력이다. 여느 스포츠 영화나 만화처럼 주인공이 역경을 뚫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내지만, <야구소녀>에는 주인공이 원하던 바를 당연히 성취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돌파할 수 없는 장벽을 넘어가기 위해 우회로를 탐색하는 것이 수인과 이 영화가 택한 길이다. 진태는 야구단 박 감독에게 수인의 공이 회전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인에게 강속구 대신 너클볼을 던져볼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우회로이다. 직구는 물론 대부분의 구질과 다르게, 공의 경로가 급속하게 바뀌는 너클볼이라는 구질은 수인의 행보 자체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영화가 이 과정을 담아내는 방식은 다소 투박하다. (여느 스포츠 장르처럼) 수인은 손바닥이 벗겨져 피가 날 때까지 공을 던지고, (여느 스포츠 장르처럼) 주인공의 엄마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식의 활동에 반대하며, (여느 스포츠 장르처럼) 극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이러한 인물구성 및 플롯과, 수인이 트라이아웃을 진행하는 장면에서의 슬로모션 등은 스포츠 장르 클리셰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야구소녀>는 클리셰 밖으로 나가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클리셰들의 우회로를 택한다. 그렇다고 그렇다 크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재능과 노력을 갖춘 주인공이 맞닥뜨린 역경을 코치와 친구 등의 주변인들과 함께 해쳐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역경은 같은 장르의 다른 작품들이 보여준 역경과는 다르다. 수인 앞에 놓인 역경은 자신을 시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가 수인의 패배감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이 그간 해온 것을 시험해볼 수조차 없다는 것이 그 원인이다. 꿈꾸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공통의 원인을 지닌 각기 다른 캐릭터들은 수인에게 그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해 움직인다. 영화 내내 경기 장면이 단 한 장면, 그것도 짧게 몽타주된 장면으로만 등장했다는 것은 영화의 중점이 ‘스포츠’보다는 ‘스포츠 선수가 되기 위한 조건’의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야구소녀>의 영화적 완성도는 분명 어딘가 아쉽다. 클리셰를 쫓아가는 야구 연습, 경기, 테스트 장면과는 다르게 사뭇 차분한 일상적인 장면들은 종종 영화보다는 TV드라마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특히 진태가 이혼한 부인과 만나는 장면 등은 TV드라마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식의 촬영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게다가 수인과 진태가 계단에서 훈련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줌아웃은 다소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야구소녀>는 캐릭터를 구성하고 다루는 데에 장점을 드러낸다. 특히 각 캐릭터의 전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몇몇의 대사와 상황으로 설명한다던가, 뻔한 로맨스 관계를 그려내는 대신 그것을 암시만 하는 등 직접 묘사하지 않고 각 인물들의 현재에 집중하는 모습 등이 인상적이다. 수인이 마침내 트라이아웃에 참가하는 장면에서 각 캐릭터들의 모습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주인공인 수인이 영화 내내 쌓아온 자신의 역할을 이어가는 동안, 함께 모여 관람하던 진태, 정훈, 해숙은 어느새 각기 다른 위치에서 수인을 바라본다. 거기에 프로리그에 도전하는 또 다른 여성 선수인 정제이미가 포함되며, 카메라가 다섯 캐릭터를 오가며 수인의 도전과 연관된 맥락을 만들어낸다. 영화적 구성에 있어서 특별한 장면은 아니지만, <야구소녀>의 캐릭터들이 성공적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결국 이 영화는 어떤 특출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홀로 견뎌낼 수 없는 역경을 견뎌내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댄 스캔런 202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