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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05. 2020

2020-07-05

1. 종강하고 그 동안 사놓고 보지 않았던 블루레이들을 하나씩 보는 중이다. 이번 주에는 애로우 비디오에서 출시된 크로넨버그의 초기작과 아벨 페레라의 장편 데뷔작 <드릴러 킬러>, 애로우 아카데미에서 출시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초기작과 <페트라 본 칸트의 쓰디쓴 눈물>, 존 카펜터의 <빅 트러블 인 리틀 차이나>, 영자원에서 출시한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봤다. 크로넨버그의 초기작들은 그의 70년대 말~80년대의 바디호러 걸작들보단 90년대의 심리 스릴러적인 면모가 더 많이 느껴졌는데, 아무래도 예산 문제로 무성으로 촬영한 뒤 내레이션을 덧붙인 <트랜스퍼>나 한정된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진행되는 <프롬 더 드레인> 때문인 것 같다. <드릴러 킬러>는 생각보다 재미 없었다. <빅 트러블 인 리틀 차이나>는 쌈마이한 취향의 재미로 가득했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신상옥의 세련됨을 새삼 다시 발견하기도 했다. 파스빈더의 초기작들은 생각보다 밋밋했는데, 어딘가 프랑스 누벨바그 초기의 시도들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첫 장편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의 베를린 영화제 상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End of the Commune>도 같은 맥락에서 밋밋했다. 물론 영어자막이라는 장벽 때문에 영화를 100% 관람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2. 그렇게 본 영화 중 가장 인상깊은 영화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이었다. 파스빈더의 많은 작품은 더글라스 서크의 영향에 속해 있으며, 서크는 소격효과로 대표되는 브레히트적인 기법을 선보여 왔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이나 <바람에 쓴 편지>와 같은 작품들의 이야기는 익숙한 멜로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지만,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혹은 로맨스)보다는 사회적인 것(계급, 인종, 정치 등)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와 같이 파스빈더는 서크에게서 받은 영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이는 영화의 기법으로도 이어진다.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은 <13월인 어느 해에>와 <퀘렐> 등으로 이어지는 파스빈더의 여러 퀴어 영화 중 한 편이다.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 페트라 폰 칸트는 젊고 아름다운 모델 지망생 카린과 사랑에 빠지지만, 카린은 여러 남자들을 만나며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다가 호주에 있는 남편에게 돌아간다. 이를 모두 지켜봐온 페트라의 비서 마들레네는 결국 페트라를 떠난다. 파스빈더는 “사랑이란 사회적인 억압을 하기 위한 최선의, 가장 교활하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영화 내내 마들레네가 페트라를 사랑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페트라 사이에는 비서와 디자이너, 피고용인과 고용인이라는 계급적 선이 그어져 있다. 페트라가 마들레네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갈등하는 순간에도 마들레네는 존재한다. 그는 프레임 어딘가에 포커스아웃된 상태로 흐릿하게 등장하고, 혹은 카메라 바로 앞에서 다과를 준비하거나 무언가를 정리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프레임 밖에 위치할 때는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처럼 페트라의 모든 말을 타자기로 받아 적는 소리가 들려온다.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사랑이 관계의 봉합 혹은 두 사람의 결합으로 다뤄졌다면, 서크의 작품에서 사랑은 관계를 봉합함으로써 균열을 드러냈다. 파스빈더는 서크 영화에서의 방식을 이어받는다. 사랑의 브레히트적 기능전환, 이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의 시청각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 마들레네의 존재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에미의 프레임 속으로 침범하듯 들어오는 알리가 다른 프레임들에서는 프레임 내부의 프레임에 의해 배제되는 모양새를 띠는 것으로 전개된다. 


3. 종강하고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의 엔딩을 봤다. 인터랙티브 무비 형식의 게임에 대해 굉장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이게 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 졸라게 지루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을 하면서 약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나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와 다른 지점은 선형적인 스토리라인을 쫓아가도록 선택지를 제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플레이'하는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후자의 두 작품이 선택-감상-선택-감상의 연속이라면, 전자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 선택을 번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레이한다'는 감각을 가져온다. 물론 후자의 두 작품도 되돌아가 선택지를 다시 고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챕터를 완료한 이후 블루레이의 장면선택마냥 특정 장면을 선택해 다시 플레이하는 것에 가깝다. 즉, 후자의 경우들은 다시 플레이한다기보단 다시 감상하는 것에 가깝다.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는 이러한 요소를 게임의 핵심으로 삼아 인터랙티브 무비 특유의 지루함을 상쇄시킨다. 경비원을 피해 방을 빠져나온다던가, 시간을 되돌려도 소지품은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설정, 중간중간 등장하는 추리 퍼즐 요소 등이 지루함을 덜어주기도 한다. 특히 경비원 등을 피해 탈출하는 시퀀스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어처구니 없는 액션 플레이보다 더욱 액션/잠입 게임 장르에 가까운 플레이가 가능하기도 하다. 여튼 재밌게 플레이 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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