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체험과 게임적 체험의 교환 가능성
*씨네21 영화평론상 이론비평 부문에 냈다가 낙선된 글.
2019년 최고의 영화를 묻는 『인디와이어』의 설문에서 루카 구아다니노는 코지마 히데오의 콘솔게임 [데스 스트랜딩]을 꼽았다. 같은 설문에서 봉준호가 데이빗 핀처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인드헌터> 시즌2를 꼽은 것처럼, 게임이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오르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와 게임(여기서 게임은 PC 및 콘솔게임으로 한정한다)의 관계는 점점 영화와 TV드라마의 관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영화를 접할 수 있는 매체가 급속도로 늘어남과 동시에 시네마라는 단일한 경험은 조금씩 폭파되고, 시네마의 바깥으로 규정되던 매체들은 시네마적 경험이 유실된 자리를 조금씩 메운다. 우리는 이제 유튜브, 넷플릭스, 스마트폰, 전광판, PS4, 트위치, SNS에 올라온 움짤과 짧은 영상에서도 영화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게임은 점차 다면적인 내러티브를 컷씬[1]이나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통해, 혹은 게임 내에서의 영화적 방법론을 통해 영화에 다가간다. 발전하는 그래픽과 물리엔진을 통해 질감과 운동의 리얼리티를 획득한 게임은 같은 영상매체라는 점에서 종종 영화와 동일선상에 놓인다. 또한 e-스포츠에서부터 게임 발매 전 공개되는 트레일러와 실시간 스트리밍까지, 우리는 게임을 ‘관람’한다. “영화 같다.”라는 일종의 감탄사가 게임에서도 통용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 <1917>의 원 컨티뉴어스 숏, <하드코어 헨리>의 1인칭 시점 숏, <레이드: 첫번째 습격>의 스테이지 구성을 놓고 우리는 “게임 같다.”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종종 영화를 관람하고 느끼는 체험을 게임을 플레이하며 느끼는 체험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이 동일시는 성립하는가? 아주 잠시 스치는 두 매체 경험 사이의 유사성을 같은 체험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게임을 소재로 한, 연상시키는, 유사한 체험을 제공하는 영화들과 게임이 스치며 발생한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영화와 게임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마침내 겹치는 영역을 찾고자 한다.
1.
‘보는 매체’로서 영화와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이다. 영화, 더 나아가 사진까지 포괄하는 기술재생산 매체가 회화와 같은 기존의 시각매체와 프레임이라는 틀을 공유하면서도 그것과 구별되는 것은 프레임 외부의 공간이 존재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회화에선 프레임 밖의 외화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사진이나 영화에는 외화면이 존재한다. 이 같은 기술재생산 매체는 현실을 프레임으로 분절하고, 그것을 복제하여 재생산한다. 이는 게임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게임 또한 외화면을 필요로 한다. 호러, 액션, 어드벤처 등 곳곳에서 적과 장애물이 쏟아져 나오고 숨겨진 퍼즐을 찾아내야 하는 게임들은 물론, [테트리스]와 같은 아케이드 게임마저 블록이 내려오는 외하면 공간을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와 게임의 공간 경험은 사뭇 유사하게 느껴진다.
두 매체의 공간 경험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체험’의 영역을 살펴보기 위해 헤르만 슈미츠의 신체현상학 이론[2]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슈미츠는 대상에 대한 공간적 지각이 신체와 대상 사이의 상대적인 위치에 대한 지각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더 풍부한 내용과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일상적인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장소 공간과는 다른 층위에 있는 공간 경험을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공간 경험이 전체적으로 세 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이어서 인간이 그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확장 공간이다. 그것은 마치 날씨를 감지하는 것처럼 인간이 이미 자신을 감싸고 있는 원초적인 공간적 분위기를 느끼는 경험 상태이다. 둘째는 좌우, 상하, 전후와 같은 기초적인 방향성의 정향이 이루어지는 방향 공간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지각과 행위는 이러한 방향성의 정향에 근거하며, 슈미츠는 운동이 방향 공간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방향 공간은 물리적-객관적 공간 규정의 토대가 되며, 이를 통해 세 번째 공간 경험의 층위인 장소 공간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차원적인 공간으로, 일상적으로 사물의 위치나 운동에 대해 전제하는 공간 경험이다. 슈미츠는 공간 경험의 세 층위 사이에 또 하나의 층위를 추가한다. 그는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아니라 주체가 감정에 ‘사로잡힌’ 상태 자체에 주목함으로써, 어떤 장소에서 감지되는 독특한 분위기로서의 감정의 공간성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위치와 간격 없이, 분할할 수 없는 부피감을 지닌” 것으로 출현하며, 근본적으로 방향성을 지닌다. 때문에 감정 공간은 방향 공간과 장소 공간의 두 층위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간 경험이다. 또한 특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확장 공간과도 다른 층위의 경험이다. 슈미츠는 감정 공간의 경험에선 언제나 주관이 직접적으로 관계되고 신체성이 느끼는 ‘정동적 놀람’의 상태를 동반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들뢰즈가 『시네마1』에서 분류한 ‘감정-이미지(affect-image)’라 분류한 것에 상응한다.
다시 영화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보자. 영화는 본질적으로 운동의 재현이다. 영화를 의미하는 여러 용어들(cinema, kino, motion picture, movie 등)은 매체적 조건을 의미하는 film을 제외하고 모두 운동을 뜻하는 희랍어 kinesis와 라틴어 movere로 소급된다.[3] 크라카우어는 “운동이야말로 영화 매체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영화적 공간 경험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장소 공간들의 결합이 아닌, 동적인 카메라와 몽타주 등에 의해 공간 경험의 다양한 층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휴고>에서 재현하기도 했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에 얽힌 과장된 이야기에서 이미 영화의 역동적인 공간 경험은 증명된다. 이는 영화의 카메라가 근본적으로 동적인 상태에 있으며, 관객은 자신의 시선을 영화의 카메라와 동일시함으로써 좌석에 앉아 있음에도 운동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버스터 키튼의 <셜록 2세> 속 극장 시퀀스에서 그러한 동일시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영사기사인 주인공은 영사실에서 자신이 영사하는 영화를 보던 중 상영관의 스크린으로 달려가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영화 카메라로 분절된 장소들이 스크린에 펼쳐지고, 주인공은 공간의 운동에 따라 운동한다. 여기서 주인공의 운동은 영사되는 영화의 카메라가 운동하는 방향을 따른다. 상영되는 영화 속으로 뛰어들어간다는 다소 극단적인 설정의 장면이지만, 주인공이 스크린에 등장한 인물의 얼굴에 짝사랑하는 여성과 경쟁자인 남성의 얼굴을 대입시키고 그 속으로 돌진한다는 점, 그 속에서 카메라의 방향성에 따라 주인공의 신체가 운동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확장 공간, 방향 공간, 감정 공간이라는 공간 경험의 세 가지 층위를 영화에서 해명한다.
그렇다면 게임에서의 공간 경험은 어떠한가? 게임 또한 영상 매체로써 (가상의) 카메라를 전제로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영화가 프레임을 통해 현실의 장소를 분절하고, 앵글이나 몽타주를 통해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면, 게임은 하나의 독립적인 가상의 공간적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은 [호라이즌 제로 던]처럼 상상의 공간일수도, [GTA] 시리즈처럼 현실을 기반으로 한 변형된 공간일수도 있다. 게이머는 영화의 관객과 마찬가지로 게임 속 플레이어를 따라다니는, 혹은 플레이어의 일인칭 시점인 (가상의) 카메라와 자신의 시선을 동일시한다. 가령 일인칭 시점을 사용하는 [둠 이터널]에서, 게이머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우주해병 둠가이의 시점으로 게임의 가상공간을 경험한다. 카메라는 둠가이의 시점과 동기화되고, 그것을 보는 게이머의 눈은 게임의 카메라에 동기화된다. 카메라는 폐허가 된 지구나 악마들의 둥지를 인지하고, 게이머의 조작에 따라 게임의 가상공간 속에서 움직인다. 영화의 카메라처럼, 여기서의 카메라는 게이머의 조작을 따라 인간의 시각을 벗어나 적에게 돌진하고 공간을 탐색한다. 지가 베르토프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통해 ‘키노-아이’를 주장한 것처럼, 관객-게이머는 영화뿐 아니라 게임의 카메라에서도 “인간의 비운동성으로부터 해방”되며, “돌격하는 병사들 앞으로 돌진하고, 다시 그들의 등 뒤로 다가간다.”. 슈미츠는 사실성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에서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상태가 제공하는 신체성의 경험과 상황-인지적 발견에 주목하는 능력을 ‘유희적 동일시’라 정의한다. 영화 및 게임의 카메라와 동일시하는 것은 이러한 유희적 동일시이다. 관객은 베르토프가 실천으로 옮긴, 인간 신체기관의 한계를 넘어선 ‘키노-아이’에 동일시함으로써 카메라를 통한 공간 경험에 참여한다. 때문에 영화의 공간 경험은 게임을 비롯한 영상매체 기반의 디지털 미디어의 공간 경험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되며, 이에 기반해 영화에서 게임의 체험을, 게임에서 영화의 체임을 느낀다고 착각한다.
다만 영화에서 방향 공간을 규정하고 그에 기반한 감정 공간의 경험을 결정하는 것은 카메라 자체가 내포한 방향성이다. 대상을 위에서 볼 것인지 밑에서 볼 것인지, 대상을 프레임의 상하좌우 중 어느 곳에 위치시킬 것인지, 클로즈업인지 풀 숏인지,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는지 혹은 패닝, 트래킹, 핸드헬드 등의 방식으로 움직일 것인지에 따라 방향성이 결정되고, 그것은 곧 영화의 감정 공간적 경험을 구성하는 감정의 벡터를 생산한다. 반면 게임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것이 일인칭 시점이든, 캐릭터를 쫓아다니는 전지적 삼인칭 시점이든, 카메라는 플레이어의 조작을 따라 움직인다. 게임에서의 카메라가 영화와 같이 방향성을 규정하는 순간은 컷씬이나 시네마틱 트레일러처럼 영화의 카메라 운용을 고스란히 반복할 때뿐이다. 도리어 게임의 카메라와 그것의 운동성은 게임이 그려내는 가상공간의 비장소성과 연관된다. 인류학자 마크 오제는 비장소를 “잠시 거쳐가는 환승의 장소이고,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 아닌 스쳐지나가는 곳”이라 정의한다. 게임은 이러한 비장소를 장소로 변형한다. 게임의 카메라가 가진 게이머의 플레이에 따른 무작위적인 방향성은 게이머로 하여금 장소가 아닌 공간들을 탐험하도록 만든다. 이 과정에서 오제가 비장소라 정의한 익명적 장소들, 가령 백화점이나 공항 등의 비장소는 [레프트4데드]나 [콜 오브 듀티: 모던 워 페어] 등의 게임에서 전투, 생활, 발견의 장소로 재정의된다. DLC[4]로 발매된 [라스트 오브 어스: 레프트 비하인드]에서 주인공 엘리는 친구 라일리와 백화점에서 재회하고 오락을 즐기며 좀비와 사투를 벌인다. 게이머는 엘리를 쫓는 카메라를 조작하여 게임의 비장소를 탐색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재회, 오락, 사투는 비장소를 재정의한다. 여기서 게임의 서사는 단일한 방향을 향하지만, 그것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게이머의 선택이 개입되는 카메라이다. 즉, 게임에서 카메라의 방향성은 게임의 가상공간을 돌아다니는 게이머의 무작위적인 선택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영화과 다르며, 게임에서의 공간은 이동과 정복을 통해 의미가 형성되는 경험 공간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마지막 미션은 최초로 이스터 에그가 발견된 게임인 아타리의 1979년작 [어드벤처]에서 이스터 에그를 찾는 것이었다.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던 주인공 퍼시발/웨이드는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해서는 단순히 게임을 이기는 것뿐 아니라, 계속 플레이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한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게임이라는 경험의 본질이 공간을 탐험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2.
영화의 카메라와 게임의 카메라는 모두 운동성을 내재하고 있지만, 관객 혹은 게이머에게 다가오는 공간 경험은 사뭇 다르다. 영화의 운동성이 감정 공간 경험을 규정한다면, 게임의 운동성은 비장소인 게임의 가상 공간을 장소로 만든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둠>과 그것의 원작이 되는 게임 [둠] 시리즈를 살펴보자. 영화 <둠>은 특별한 서사가 주어져 있지 않던 게임인 [둠]에 서사를 부여했고, 그 결과물은 모두가 알고 있듯 실패에 가깝다. 다만 2005년 당시엔 흔치 않았던 일인칭 시점을 활용한 후반부의 액션 시퀀스는 나름대로 호평을 얻어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일인칭 시퀀스의 카메라는 관객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포털을 통해 공간을 이동하거나 일인칭을 벗어나는 컷씬이 등장하지 않는 한 숏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게임과 달리, 영화에선 두세 차례 숏이 전환되기도 한다. <둠>에서의 일인칭 화면과 [둠]에서의 일인칭 화면의 연출은 이동하며 적과 전투를 벌이는 비장소의 공간들을 파헤치고 탐색하는 과정을 롱테이크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하다. 둠가이가 생존을 위해 악마와 싸운다는 단순한 줄거리의 게임에선 일인칭을 통해 보여지는 고어한 연출은 생존과 탈출 그리고 폭력의 쾌감에 집중한다. 악마의 머리나 사지가 잘려나가고 피가 터지는 연출은 시리즈의 최신작 [둠 이터널]에선 발전한 그래픽 기술을 통해 더욱더 생생하게 그려진다. 반면 게임에서의 일인칭 연출은 일인칭 시퀀스 이전에 붙은 장면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일인칭 시퀀스 이전 장면에서 쌍둥이인 사만다와 함께 있던 존은 악마의 습격을 받는다. 사만다는 항체와 유사한 것을 그에게 주사하고 존은 기절한다. 존이 깨어나면서부터 일인칭 시퀀스가 시작되며, 그는 암전된 사이 사라진 사만다를 찾아 공간을 헤맨다. 암전 이후의 일인칭 시퀀스의 방향성과 역동성은 그 이전에 전개된 존과 아만다 사이의 대화 시퀀스에 기반한다. 때문에 존이 악마를 처단하는 클로즈업 숏은 게임의 클로즈업이 담아내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노와 절박함이 뒤섞인 감정의 벡터를 산출한다.
즉, 유사한 방법의 연출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선보일지라도 영화와 게임이 제공하는 체험은 사뭇 다르다. 이는 단순히 서사적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게임의 공간 경험은 분절된 개별적 공간들 사이를 이동하는 것을 통한 의미형성으로 이루어진다. 즉, 게임에서의 공간 경험은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개되며, 게임적 체험은 카메라를 통한 이동에서의 유희적 동일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며 공간을 발견하고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 게임의 본질에 가깝다. 좀비떼를 피해 쉘터에서 또 다른 쉘터로 이동하는 [레프트4데드], 물품을 짊어지고 폐허가 된 미국을 가로지르는 [데스 스트랜딩], 혹은 출발점에서 도착점으로 이동하며 발견되는 공간들을 탐색하고 전략을 구축함으로써 게임이 진행되는 [소닉 더 헤지훅]이나 [슈퍼마리오] 등의 고전까지 이러한 본질을 따르고 있다. 반면 영화에서의 공간 경험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결정된 방향성을 기반으로, 이동보다는 공간 자체에 주어진 운동과 분위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오손 웰즈의 <악의 손길> 속 유명한 롱테이크를 되새겨보자. 카메라에 담기는 공간은 전형적인 비장소로써의 길거리다. 인물들은 그 안에서 이동하고, 카메라는 차량과 건물을 넘어가며 이들을 쫓아간다. 여기에 장소성을 부여하는 것은 시퀀스 초반에 삽입된, 자동차 트렁크에 폭탄을 장착하는 모습이다. 시한폭탄에 걸려 있는 4분 남짓의 시간은 롱테이크의 러닝타임과 거의 동일하게 흘러가고, 비장소인 길거리는 ‘폭탄이 터질 곳’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장소성을 부여받는다. 이 과정에 개입되는 것은 외화면과 내화면을 오가는 폭탄이 부착된 자동차와 인물들, 시한폭탄으로 인해 발생한 시간의 벡터와 동일한 방향성을 취하는 카메라의 운동이다. 게임에서의 운동이 가상 공간들 사이의 이동으로 다소 좁게 한정되는 반면, 영화의 운동은 방향성을 지닌 공간들의 집합이며, 이는 앵글, 프레이밍, 카메라 무빙, 궁극적으로는 몽타주를 통해 이루어진다.
송경원 평론가는 샘 멘데스의 <1917>에 대한 비평 「<1917>의 영화적 체험을 의심하다」에서 “영화의 매혹은 침묵의 빈자리, 쓸모없는 시간, 사이의 공간을 발생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반면 게임이 가상현실을 구축하는 기본은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빽빽하게 채워 넣는 것, 달리 말하면 화면 바깥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고 쓰고 있다.[6] 그의 언급은 타당하다. 게임은 외화면 영역을 남기지 않는다. 게임에서의 프레임은 게이머의 조작에 의해 항상 변화하며, 이를 통해 언제든지 외화면 영역을 프레임 내부로 옮겨올 수 있다. 레브 마노비치는 회화, 영화, 게임의 스크린을 각기 ‘정적 스크린’, ‘역동적 스크린’, ‘실시간 스크린’이라 부른다.[6] 이는 영화의 본질이 운동임을, 게임의 본질이 게이머가 가상공간에 개입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송경원은 “보여주지 않는 것은 언제나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며, “화면 바깥, 제시된 정보 바깥 영역이야말로 픽션의 힘을 발생시키는 원동력”이라 강조한다. 그리고 <1917>의 카메라가 잠시 주인공 스코필드를 떠나 외화면에 있어야 할 풍경을 비추는 것을 “침묵하는 법을 망각”하고 “즐길 만한 가상의 현실을 구축한 뒤 안전하게 머무르는 것”이라 쓰고 있다. 하지만 <1917>의 카메라는 과연 게임과 같은 ‘가상의 현실’을 외화면을 보여줌으로써 창출하는가?
잠시 다른 영화를 떠올려보자. 영화 전체를 일인칭 시점 숏만으로 연출하며 게임과 유사한 체험을 제공한다는 평을 받았던 <하드코어 헨리>의 화면구성은 전체적으로 게임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헨리를 연기하는 여러 스턴트 배우들의 머리에 액션캠을 장착하고, 그를 통해 그들이 수행하는 파쿠르나 총격전을 담아낸다. 이 때의 카메라는 게임의 것처럼 항상 선명하진 못하다. 스턴트 배우의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카메라의 초점은 종종 엇나가고, 흔들리고, 흐려진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게임의 카메라와 멀어진다. 여기엔 송경원이 지적한 외화면의 문제도 결부된다. <하드코어 헨리>의 화면은 게임과 같은 ‘실시간 스크린’이 아니다. 관객은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이미 촬영된 장면의 카메라를 움직일 수 없다. <하드코어 헨리>가 게임에서 빌려온 것은 무작위에 가까운 카메라의 방향성과 운동이지, 게임의 상호작용과 실시간성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헨리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만을 목격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외화면을 보기 위해서는 영화가 시선을 움직여주어야 한다. 그 밖에 긴 롱테이크를 사용하며 게임의 체험과 연관 지어 호평받는 영화들, 가령 <레이드: 첫번째 습격>이나 <익스트렉션>, 혹은 오우삼의 <첩혈속집> 같은 80~90년대의 액션영화의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롱테이크가 아무리 게임의 체험을 가져오려 해도,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언차티드 4: 해적왕과 최후의 보물] 속의 거대한 카체이싱이나, 게임 전체에 ‘컷’이 없는 [갓 오브 워 4]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영화 속 가상 공간과 관객을 매개하는 것은 카메라와의 동일시, 즉 시각적 감각이다. 하지만 게임 속 가상 공간과 게이머를 매개하는 것에는 시각적 감각만큼이나 플레이어가 손에 쥐고 있는 컨트롤러나 키보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그것을 통해 게이머는 게임의 외화면을 내화면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차라리 게임의 외화면은 <레디 플레이어 원>의 첫 번째 열쇠 획득 과정에서 넌지시 폭로한 것처럼 게임 내 그래픽을 통해 가려진 공간일 것이다. 이를테면, [슈퍼마리오]에서 아이템을 제공하는 물음표 블록과 같은 것 말이다.
결론적으로 <1917>의 카메라는 ‘영화의 침묵’을 망각하고 즐길 수 있는 안전한 ‘가상의 현실’을 창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없이 영화에서 멀어지려 해도 결국 그 안으로 귀결된다. <1917>이 시간의 동시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롱테이크가 사실은 트릭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영화 안에서 증명되며, 그 순간들은 다른 영화 속 롱테이크가처럼 잉여를 창출한다. 블레이크의 죽음, 스코필드가 마주친 프랑스인 여성과 아기, 병사들이 민요를 부르는 숲속, 스코필드가 마침내 쉬게 되는 나무 등은 A에서 B로 이동한다는 영화의 단순한 서사를 정지시키고 침묵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침묵들이 등장하는 순간 <1917>은 안전한 영화의 공간 속에 머무른다. 이는 A에서 B로의 이동하는 것이 본질인 게임의 공간 경험과는 다른 영화의 공간 경험이다. 관객은 영화의 카메라가 지시하는 운동과 침묵에 결박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공간 경험에 기반한 영화의 체험과 게임의 체험은 구분되며, 게임의 체험을 영화에 대입하는 것은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3.
그렇다면 영화의 체험과 게임의 체험은 어디서 스치는 것인가?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잠깐 살펴보자.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그것이 게임을 원작으로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 게임 속 지형이나 대사를 차용한다. [소닉 더 헤지훅]을 원작으로 하는 <슈퍼 소닉>은 소닉이 적과 싸우기 위해 사용한 방식(몸통박치기)를 재현한다.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맥스 페인>은 게임의 트레이드 마크인 슬로우모션을 차용하였으며, <어쎄신 크리드> 또한 게임 속 ‘신뢰의 도약’을 그대로 재현한다. 결국 게임 원작 영화가 게임의 요소를 차용하는 것은 대부분 게임에서 주요하게 사용된 대사나 지형, 혹은 특정한 동작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까? [맥스 페인]의 슬로우모션이 <매트릭스>의 슬로우모션을 차용한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차라리 이런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GTA] 시리즈를 플레이했던 게이머라면 대부분 다수의 경찰차와 추격전을 벌이는 상황을 겪게 된다. 그러한 게이머가 103대의 자동차를 박살내기 위해 수많은 경찰차를 동원하는 <블루스 브라더스>의 카체이싱 시퀀스라던가, <뱅크잡>에서 제이슨 스타덤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십 수대의 경찰차가 그의 자동차를 추격하는 장면 등을 보면서 [GTA]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블루스 브라더스>가 [GTA] 시리즈의 첫 작품보다 20년 가까이 앞서 있지만 말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블루스 브라더스>가 [GTA]의 이미지를 ‘예상표절’한 셈이다.
이러한 연상작용의 핵심은 영화와 게임이 기본적으로 영상매체라는 점이다. 하지만 둘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영화는 ‘관람하는’ 것이고, 게임은 ‘플레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동시대에 그러한 분류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글의 첫 단락에서 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해졌다고 명시했다. 유튜브의 리뷰 영상에서도, GIF 확장자를 달고 SNS를 떠도는 움짤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GTA]의 사례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에서 영화 이미지를 볼 수 있다. 디지털 환경은 영화를 조각내고 재배치한다.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OTT 서비스나 유튜브, SNS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모든 스크린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환경을 조성한다. 프란치스코 카세티가 논의한 것처럼, 영화(cinema)는 영화관(cinema)을 벗어나 우리의 눈앞에 놓인 모든 스크린에 재배치되었다.[7] 영화를 관람할 때의 공간 경험은 변화하지 않았을지라도, 영화라는 경험 자체는 변화하였다. ‘영화적’이라는 형용사는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에도, 길에서 마주하는 광고용 전광판에도, 수업 시간에 마주하는 강의실의 스크린에도 적용된다. 반면 게임은 더욱 관람하는 것이 되어간다. 유튜브나 트위치의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게임을 관람할 수 있으며, 그것은 녹화되고 편집된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다시 관람 된다. 2000년대 초반 시작된 e-스포츠에서의 게임 관람이 텔레비전의 관람이라면, 유튜브나 트위치를 통한 게임 관람은 재배치된 영화를 관람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우리는 재배치된 영화 이미지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 리그가 ESPN을 통해 미국 중계를 시작하면서, 한국의 야구팬들이 생중계된 한국 야구의 장면들을 편집하고 GIF 파일로 만들어 SNS에 공유하는 현상[8]은 재배치된 영화와의 상호작용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영화와 게임이라는 두 체험 사이 교환 가능성의 기반이 된다.
몇몇 영화에서 그러한 상호작용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이상근의 <엑시트>에서 의주와 용남은 유독가스를 피해 건물 옥상을 질주하는 장면이 드론을 통해 실시간 중계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어느 BJ가 띄운 드론이 두 사람을 발견하자 그들의 개인방송은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고, 다른 BJ들이 드론 중계영상을 자신의 방송에 띄우며 반응한다. 그들의 반응은 다시금 더 많은 드론의 등장으로 이어지며, 드론들은 유독가스를 멀리 날려보내거나 밧줄을 이동시키며 두 주인공과 상호작용한다. 여기서 개인방송 화면으로 등장한 BJ들이 실제로 게임방송을 진행하는 대도서관이나 양띵 등의 BJ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방송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BJ(게이머)과 게임을 관람하는 시청자(관객)으로 구성된다. 시청자들은 채팅 등의 방법을 통해 BJ의 게임 플레이에 개입한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게임의 공간 경험은 공간 사이를 돌아다니며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BJ와 시청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A지점에서 B로 이동하는 게이머의 공간 경험에, 가상 공간을 탐색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경험에 관객이 개입하는 것이다. <엑시트>에서 의주와 용남은 탈출을 위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다시 B지점에서 C지점으로 이동한다. 이들은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고, 이를 통해 공간에 의미를 창출하는 게이머다. 대표적인 것이 학원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동을 관람하고 상호작용하며 드론을 통해 개입하는 극 중의 시청자들은 관객이다. 혹은, 드론을 통해 두 사람을 촬영하고 이들의 이동에 개입하는 BJ들이 게이머이며, 이들은 두 사람을 탈출시키는 것을 돕는 게임을 플레이 중이고, 용남의 아버지가 BJ에게 돈을 주며 용남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게임방송의 시청자가 BJ에게 도네이션[9] 하며 상호작용하는 것과의 유비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엑시트>는 악당으로 인해 도심에서 폭주하거나 범죄를 벌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주인공이 CCTV화면이나 뉴스 카메라를 통해 중계되는 조범구의 <퀵>이나 노동석의 <골든 슬럼버> 등의 영화와는 다른, 일종의 게임성을 획득한다.
게임을 끌어오려는 몇몇 영화들의 시도처럼 게임 또한 영화를 끌어온다. ‘관람한다’는 영화의 성질을 게임에서 구현하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도입한 블리자드의 선구적인 시도나 그래픽의 발전을 통해 점점 더 영화적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컷씬’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게임 안에 있지만 짧은 단편영화로 간주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여기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인터랙티브 영화를 끌어오는 게임이다. 퀀틱 드림이 개발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캐릭터들이 인간의 감정을 습득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A.I.>나 <아이, 로봇> 등 감정을 지닌 로봇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들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이 게임은, 캐릭터의 행동을 게이머가 콘트롤러나 키보드를 통해 모방하거나 지시하는 대신 복수의 선택지를 선택하도록 한다. 어떤 대상을 탐색하거나 공간을 이동할 때의 조작은 대부분의 게임과 유사하지만, 게임의 서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요구된다. 게이머는 자신이 선택한 선택지에 따라 세 명의 캐릭터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으며, 선택의 결과는 각 챕터 별로 존재하는 알고리즘 도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게임의 플레이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 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유희적 동일시를 통해 게임을 체험하는 기존의 게임이 제공하던 상호작용이 아닌 선택지에 따라 달라지는 영상들을 관람하는 것이 플레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존의 게임 플레이에서 관람할 수 있는 것이 시네마틱 트레일러나 컷씬에 한정되었다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게임의 주된 콘텐츠를 그러한 요소로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다소 포기한 대신, 영화의 관람성을 취함으로써 ‘영화 같은 게임’이라는 평가를 획득한다. ‘인터랙티브 무비’ 혹은 ‘FMV(Full Motion Video)’라는 이 장르는 마크 해밀 등의 배우를 실제로 출연시킨 1994년작 [윙 커맨더 3]나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초기 작품들, 드라마 원작의 [위킹 데드] 등을 포괄한다. 다소 명맥이 끊겼던 FMV게임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는 블록버스터 게임으로 제작됐다는 점은, 영화 같은 게임, 관람하는 게임의 복귀를 시사한다.
4.
발터 벤야민은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고 말함과 동시에 불특정다수의 관객이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을 중요시했다.[10] 폴 비릴리오는 “영화관은 운송수단의 내부구조를 연상시키”며 “영화가 상영 장소 없이 존재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장소들이 영화 없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11]고 벤야민의 관점을 계승함과 동시에 전복한다. 우리는 장소를 SNS나 유튜브 속 영상이나 구글맵의 스트리트뷰를 통해 확인하며, 각 장소는 우리가 확인하기 이전엔 추상적인 공간에 머문다. 기존의 영화관이 관객들이 움직이지 않고 좌석에 앉아 있음에도 그들을 다른 장소로 운송하는 것이었다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스크린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영화를 통해 공간 경험을 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수많은 스크린에 재배치된 영화는 수많은 공간과 장소들로 우리를 이동시키고, 현재화한다. <1917>의 사례를 떠올려볼 때 영화의 체험과 게임의 체험을 가르는 것은 카메라의 운동에 관객-게이머가 관여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다만 <엑시트>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사례에서, 재배치라는 국면을 통해 우리는 영화를 (일정부분) 플레이하고 게임을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관람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했다.
글을 마무리하며 두 매체의 체험이 교환되는 독특한 사례를 하나 제시해보고 싶다.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과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가 그 대상이다.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데스 스트랜딩]은 몇몇 이들에게 영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는 모션캡쳐를 통해 노만 리더스를 비롯한 여러 배우들을 기용하고, 이들의 연기가 담긴 적지 않은 분량의 컷씬을 통해 서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데스 스트랜딩’이라는 이상현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지하에 건설된 쉘터에서 생활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때문에 ‘포터’라 불리는 배달부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생존에 필요한 여러 물자를 배송하며, 게임은 그러한 포터 중 한명인 샘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가 배송을 위해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각 쉘터를 연결한다는 것이 게임의 주된 내용이다. <미안해요, 리키> 또한 배달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주인공 리키는 배송대행업체 PDF에 취직한다. 즉 리키는 PDF의 사원이 아니라 자신이 배송 건수에 따라 수수료를 챙기는 개인사업자로써 PDF와 계약하고 노동을 시작한다. 영화는 이렇게 생계를 위해 ‘긱 이코노미’에 뛰어는 개인과 함께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단순히 배달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두 작품을 연관지으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샘과 리키의 직업이 배달노동자라는 점은 두 작품에서 체험의 핵심이 된다. 두 작품을 연관시키는 것은 배달노동자라는 정체성보단 배달이라는 행위가 게이머 혹은 관객에게 어떻게 체험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복수의 스크린을 통해 우리 앞으로 현재화된 이미지에 기반한다.
[데스 스트랜딩]의 핵심 콘텐츠는 ‘배송하는 감각’의 체험이다. 게이머가 플레이하게 되는 주인공 샘은 배달부다. 그에게 부여되는 임무의 대부분은 배송이다. 배송을 통해 쉘터와 쉘터 사이를 이동하고 그곳들을 연결하며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 게임 내 콘텐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데스 스트랜딩]은 게임의 가장 본질적인 공간 경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게이머는 샘의 수갑형 단말기를 통해 임부를 부여받고, 추상화된 장소들의 좌표를 보며 이동경로를 탐색한다. 그리고 플레이의 대부분은 그 좌표 사이를 이동하며 추상화된 장소의 좌표를 구체적인 장소의 이미지로 접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게이머에겐 어떤 경로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와 함께 이동수단(도보, 바이크, 트럭)이나 사용할 아이템(사다리, 로프, 플로팅 캐리어 등)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게이머는 선택지를 조합하고 배송을 수행한다. 이렇게 선택하는 상호작용과 이동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게이머는 배송하는 감각을 체험한다. 이 과정은 스크린에서 배송받은 상품으로 곧장 이어지는 공간 이동의 생략을 게임의 체험을 통해 복원시킨다. 게이머는 이동함으로써 추상화된 공간 좌표를 가시적인 장소로 변화시키고, 이 과정에서 배송하는 감각을 체험한다. 여기서 ‘배송하는 감각’은 곧 이동하는 감각으로 규정된다.
<미안해요, 리키>는 당연히 게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며, <엑시트>와 같은 영화처럼 작품 내적으로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끌어오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리키의 업무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화한 상태이다. 우리에 손에 들려 있는, 우리의 눈 앞에 놓여 있는 복수의 스크린은 끊임없이 영화 이미지를 내보낸다. 그 속에서 리키와 유사한 상황에 놓인 노동자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뉴스 화면에서, 유튜브 영상에서, SNS의 짤막한 움짤에서, 또는 ‘당근마켓’ 등의 플랫폼을 통한 직거래의 상황에서 배송을 위한 개인의 이동에서 리키와 유사한 상황을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데스 스트랜딩]의 플레이 영상을 관람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언제든지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그 스크린을 통해 노동자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PDF의 관리자가 배송정보가 찍히는 단말기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며, 리키가 강도에게 폭행당하고 얼마되지 않아 고장 난 단말기에 대한 수수료를 청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말기는 장소들로 규정되는 좌표들을 GPS와 인터넷을 매개한 정보에 따라 납작하게 추상화시키고, 그것은 게임에서 장소가 추상화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즉, 단말기 스크린에 표시되는 추상적인 좌표들과 좌표들 사이를 이동하라 지시하는 단말기의 청각적 신호는 리키의 이동을 게임에서의 이동과 유사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때문에 리키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물건을 배송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공간 경험과 유사한 상황을 체험한다. 소비자의 스크린과 연결된 리키의 단말기는 그가 향할 지점을 표시하는 미니맵이자, 임무를 부여하는 NPC이며, 리키에게 노동이라는 서사를 부여하는 컷씬이다. 이는 배송과 연관된 리키의 이동을 게임적 이동으로 규정한다. 곳곳에 산재한 스크린과 그것에서 상영되는 영화 이미지는 멀리 떨어진 장소를 현재화한다. 스크린과 영화 이미지를 매개로 장소들은 우리의 눈앞에 존재하게 되었고, 비릴리오의 말처럼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리키의 단말기 스크린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을 납작하게 추상화한 이미지로 표상된다. 반면 리키와 같은 게임적 이동을 노동으로 삼는 이들은 물리적 장소 사이를 오간다. 리키가 이동하는 좌표들은 게임에서처럼 추상화된 비장소로 표상되고, 리키의 이동을 통해 의미화된다. 관객은 복수의 스크린에서 표상되는 추상화된 장소나, 주문하고 물건을 배송받는 과정 내지는 직거래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배송하는 감각을 내재화하고, 내재화된 감각을 <미안해요, 리키>의 관람에서 발견한다. 때문에 <미안해요, 리키>는 배송추적 화면의 추상화된 장소들의 좌표나 “60분 내외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따위의 안내문자가 은폐한 배달노동자들의 게임화된 이동을 가시화하고, ‘리키의 노동’이라는 확정된 영화적 사태에 관객을 동참시키며 배송하는 감각을 전달한다. 즉, <미안해요, 리키>의 영화적 체험은 추상화된 공간 사이의 이동이라는 게임적 체험을 끌어오는 것에서 시작되며, 복수의 스크린과 영화 이미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내재화된 배송하는 감각을 기반으로 한다. 게임화된 이동이 노동인 리키의 공간 경험은 영화 카메라를 통해 영화의 공간 경험으로 확정되며, 이는 두 종류의 공간 경험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객이라는 제3항이 개입함으로써 ‘배송하는 감각의 체험’으로 다가온다. 때문에 관객은 영화의 확정된 이미지를 보면서도 게임의 공간 경험을 상기하게 되며, 관객의 신체를 축으로 하는 동일시가 발생한다.
두 작품의 연관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데스 스트랜딩]의 플레이를 통해 복원된 배송하는 감각은 <미안해요, 리키>의 관람에 삽입됨으로써 체험된다. 전자는 게이머들이 복수의 스크린과 영화 이미지를 통해 내재화한, 하지만 누군가의 비가시화된 노동으로 인해 감각하지 못하던 배송하는 감각을 체험하도록 한다. 후자는 누군가의 비가시화된 노동을 확정된 영화 이미지로 가시화함과 동시에, 내재화된 배송하는 감각과 상호작용한다. 여기서 사뭇 다른 두 매체의 공간 경험은 두 작품에서의 영화적 체험과 게임적 체험이 관객 혹은 게이머에 내재화된, 일상적으로 보게 되는 스크린들 속에서 관람한 이미지에 기반한다. 즉, 관객-게이머의 눈을 통해 관람된 영화와 게임의 이미지를 통한 공간 경험이 두 매체의 체험을 규정하며, 복수의 스크린과 재배치라는 국면을 맞이한 영화 이미지는 상이한 두 매체의 체험이 뒤섞이는 기반을 창출한다. 때문에 <미안해요, 리키>라는 영화와 [데스 스트랜딩]이라는 게임의 매체 차이에 의한 공간 경험의 불일치는 관객-게이머가 이미 관람한 이미지라는 제3항을 통해 겹칠 수 있다. 그리고 영화와 게임의 ‘스침’이 발생시킨 체험의 교환 가능성은 제3항인 관객-게이머의 눈을 통해 발견되는 상이한 두 체험 사이에 ‘겹침’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겹침의 영역, 영화와 게임이 스치며 만들어낸 부스러기들을 힌트 삼아 탐색한 영역의 기반은, 역설적이게도 카메라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복수의 스크린으로 둘러 쌓여 무차별적으로 상영되는 영화 이미지를 응시하는 우리의 눈이다. 이러한 교환 가능성과 겹침은 일상에서의 공간 경험 일반을 영화적, 혹은 게임적 체험으로 귀결시켜 일상의 감각을 영화나 게임의 감각으로 착각하는 오류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반면, 게임적 체험으로 추상화된 실재는 게임([데스 스트랜딩]의 울퉁불퉁한 지형, 괴생명체의 출몰)과 영화(<미안해요, 리키>의 교통체증, 불친절한 고객, 폭력배)에서 출몰한 실재를 통해 복원된다. 우리는 유사하면서도 동떨어진 게임적 체험과 영화적 체험을 맞닿게 하는 것을 일상적 체험의 오류를 해명하는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우리의 눈앞에 놓인 것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등장한 겹침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응시하고 해명하는 과제이다.
[1] 상호작용적이지 않은 비디오 게임의 시퀀스
[2] 슈미츠의 저술은 국내에 출간되어 있지 않으며, 슈미츠의 신체현상학 이론에 대해선 하선규. 「공간, 영화, 영화-공간에 대한 미학적 고찰」.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2호. 2008, pp. 295-333 등의 논문을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3] 하선규. 「공간, 영화, 영화-공간에 대한 미학적 고찰」. 『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2호, 2008, pp. 295-333
[4] 다운로드 가능 콘텐츠(Downloadable Content). 주로 이미 발매된 게임에 새로운 모드, 레벨, 임무 등을 추가하는 확장팩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5] 송경원. "<1917>의 영화적 체험을 의심하다". 「씨네21」. 1246호. 2020, pp.66~69 사실 이 글은 송경원 평론가의 글에서 제기된 영화의 체험과 게임의 체험을 비교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6] 마노비치, L. 『뉴미디어의 언어』. 서정신 역. 서울: 생각의 나무, 2004
[7] 카세티, F. (2019.08.14). “영화의 재배치”. 호랑이의 도약. 채희숙 역. 검색일 2020.05.06. 출처http://tigersprung.org/?p=1763
[8] 트위터에 #KBO_IS_WILD를 검색하면 한국 트위터리안이 공유한 수많은 한국야구 움짤을 볼 수 있다.
[9] 스트리밍 플랫폼 트위치에서 시청자가 BJ를 후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인터넷 용어
[10] 벤야민, W.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7.
[11] 비릴리오, P. 『소멸의 미학』. 김경온 역.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