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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1. 2020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제이 로치 2019

 2016년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의 미국, 보수언론의 대표적 채널인 폭스 뉴스에서 황금시간대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그레첸(니콜 키드먼)이 회장인 로저(존 리스고)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트럼프와 설전을 벌여 폭스 뉴스의 간판 앵커가 된 메긴(샤를리즈 테론)과, 유명 방송인이 되기 위한 야망을 품고 있던 신입 케일라(마고 로비) 또한 그레첸과 더불어 로저의 성범죄 사실을 폭로한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그레첸을 필두로 메긴을 비롯한 20여 명의 여성이 폭스 뉴스의 공동설립자인 로저 에일스의 성범죄를 폭로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레첸 및 메긴과는 다르게 케일라는 익명의 성범죄 폭로자를 상징하는 가상의 캐릭터이며, 이들의 폭로와 고소는 미국에서 미디어 업계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판례를 남겼다. 이는 2017년 초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가 폭로되면서 촉발된 미투 운동보다 1년 앞서 벌어진 사건이며, 이 사건으로 로저 에일스는 폭스 뉴스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밤쉘>에는 <빅쇼트>를 통해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찰스 랜돌프가 각본으로, <트럼보> 등 주로 실화에 기반한 영화를 연출해온 제이 로치가 연출로 참여했으며, 메긴 역의 샤를리즈 테론이 제작에 참여했다.

 찰스 랜돌프가 참여한 만큼, <밤쉘>은 빅쇼트와 유사한 형식을 취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폭스 뉴스의 간판 스타인 메긴이 뉴욕 폭스 뉴스 본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관객에게 폭스 뉴스를 소개하는 소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폭스 뉴스가 미국에서 어떤 위치에 놓인 언론사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켜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 이후에도 메긴, 그레첸, 케일라 등 세 명의 주요 인물은 종종 카메라를 바라보며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빅쇼트>에서는 이러한 형식이 주로 블랙코미디에 활용되었다면, <밤쉘>에서는 폭로자들이 관객에게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밤쉘>의 목적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역학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뿐 아니라 메긴을 보조하는 직원인 줄리아(브리젯-런디 페인)와 릴리(리브 휴슨), 케일라의 사무실 옆자리 동료임과 동시에 폭스 뉴스 직원이지만 몰래 힐러리를 지지하며 레즈비언 정체성을 숨기며 생활하는 제스(케이트 맥키넌)가 함께 등장한다. 또한 로저의 위력을 통해 얻은 자신의 유명세를 잃지 않으려는 방송인들과, 단역으로 출연한 수많은 여성 직원들의 시선이 주요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쫓아 반응한다.

 이들의 반응을 통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작동하는 역학을 살펴볼 수 있다. 로저는 피해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유명세를 보장한다. 그것이 그가 가진 권력이다. 동시에 그 일자리들은 여성들을 착취한다. 로저는 끊임없이 “TV는 시각적인 미디어”라고 말하며 여성 방송인들의 얼굴과 몸매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로저는 또한 피해 여성들이 서로를 이간질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누군가가 채우던 자리에서 누군가를 플러그 뽑듯 뽑은 뒤 새로운 누군가를 그 자리에 꽂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인물이다. 결국 로저의 성범죄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피해 경험이지만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진실로 은폐된다. 케일라의 캐릭터는 이러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그레첸의 캐릭터는 그것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메긴의 캐릭터는 양자를 오가며 이미 시작된 폭로 속에서 피해 여성이 어떤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함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메긴과 트럼프의 방송 및 트위터에서의 설전은 이미 이러한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밤쉘>은 이 과정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다소 산만한 오프닝과 끝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방송인, 정치인, 법조인의 이름이 관객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지만, 영화는 피해가 발생하는 것에서부터 그것이 폭로되기까지의 과정을 명확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적지 않은 러닝타임을 차지하는 피해의 재현은 적지 않은 관객에게 트리거 요소로 작용할 만큼 세세하게 묘사된다. 특히 케일라가 로저의 방을 처음 찾아가는 시퀀스가 문제적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머독 일가의 묘사이다. 말콤 맥도웰이 연기한 루퍼트 머독은 폭스 그룹의 설립자이며, 그의 두 아들은 폭스 뉴스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마치 이들이 피해 여성들의 폭로를 받아들여 로저의 사임을 종용하는 듯한 모양새로 그려진다. 물론 로저는 해고당하지 않았고 사임했으며, 영화 마지막의 자막이 알려주듯 로저와 또 다른 가해자인 빌 오라일리는 퇴직금으로 피해 여성 모두가 받은 배상금보다 더욱 많은 금액을 받았다. 루퍼트 머독은 로저가 사임한 뒤 폭스 뉴스의 회장으로 부임했고, 그 결과는 현재의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결말은 머독 일가와 폭스 뉴스의 해악을 축소해버릴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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