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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29. 2020

<소년시절의 너> 증국상 2019

 고등학교 3학년인 첸니엔(주동우)는 대입 시험을 며칠 앞두고 있다. 아빠는 없고, 다단계 사업에 뛰어는 엄마는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신세이다. 어느 날, 그다지 친하진 않았던 급우 후샤오디에(장예범)가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첸니엔은 시신에 옷을 덮어줬다는 이유로 후샤오디에를 괴롭히던 웨이라이(주이) 무리의 타겟이 된다. 그러던 중 첸니엔은 깡패에게 맞고 있던 샤오베이(이양천새)를 우연히 돕게 된다. 샤오베이는 첸니엔에게 돈을 받고 보호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정 형사(팡인)에게 웨이라이가 후샤오디에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말한 뒤 더 많은 괴롭힘을 받던 첸니엔은 그 제안을 수락하지만, 어느덧 첸니엔과 각별해진 샤오베이는 돈을 받지 않고 첸니엔을 보호해준다.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가 생겨나면서 첸니엔의 대입 시험은 점차 다가온다.

 주동우가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이후 증국상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소년시절의 너>는 중국에서 학교폭력 방지법 제정의 도화선이 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에서의 대학 입시 또한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선생들은 대학 입시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다면서도 그것이 학창시절의 제1목표라 역설한다. 후샤오디에의 자살 이후 쇠창살이 쳐진 학교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감옥, 특히 역-판옵티콘과 같은 모습을 연상시킨다. 소수의 감시자가 다수의 죄수를 감시하며 ‘감시받고 있다’는 감각을 주입해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역-판옵티콘은 소수가 다수에게 감시당하는 것이다. 사회학 이론에선 시민이 정부를 감시하는 정보화시대의 새로운 양상으로 소개하지만, 영화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역-판옵티콘은 관객과 배우의 관계와 유사하다. 구도의 중심에 놓인 것은 감시자가 아닌 소수의 감시대상이며, 감시자가 된 다수는 감시대상을 계속하여 평가한다. 웨이라이가 주도하는 무리와 첸니엔의 관계를 단순하게 관객-배우의 구도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첸니엔이 후샤오디에의 시신에 옷을 덮어주는 장면은 이를 연상시킨다. 첸니엔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은 감시도구(스마트폰)를 꺼내 들고 첸니엔을 촬영한다. 감시도구를 통한 평가는 곧장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 구도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은 구도 밖의 존재자, 가령 선생이나 경찰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선생은 되려 위와 같은 구도를 생산하는데 기여하고, 학교 밖 외부자인 경찰은 더욱 큰 규모의 같은 구도인 사회 속에서 기능을 상실한다. 첸니엔의 폭로는 그에게로 향하는 폭력의 또 다른 구실이 될 뿐이다. 첸니엔이 선생이나 경찰과 같은 ‘어른’인 외부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대신 샤오베이에게 향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흔히 말하는 ‘어른’도, ‘사회생활’이라는 범주에 속한 것도 아닌, 고아, 탈학교 청소년, 양아치라는 낙인은 샤오베이와 첸니엔의 관계 사이에서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는다. 대학 입시라는 제1목표 밖에 위치한 사람으로서 구도를 조망할 수 있는 사람, 구도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외의 계획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샤오베이는 위치한다. 

 때문에 <소년 시절의 너>에서 흥미를 끌었던 인물은 정 형사이다. 젊은 형사이며,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경찰대에 진학해 경찰이 된, 그리고 학창시절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었다고 기억하는 인물이다. 그는 정의감을 갖고 첸니엔을 도우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빈번히 가로막힌다. 처음의 시도가 학교 및 학교를 둘러싼 사회가 생산하는 구도에 의한 것이었다면, 두번째 시도는 첸니엔과 샤오베이가 생산한 새로운 구도에 의해서이다. 스스로 어른임을 자청하며 어른이 되는 것은 다이빙하는 것과 유사하다 말하는 그는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어른이라는 상’에 따라서 생각하고 상상한다. 첸니엔을 돕겠다는 정 형사의 정의감은 종종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첸니엔을 끼워 맞추려는 것으로 변모한다. 그는 어른으로서 자신이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가 상상하고 말한 것이 답에 가까울 수는 있어도 첸니엔과 샤오베이가 만들어낸 답일 수는 없다. 

 <소년시절의 너>의 탁월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통해 생산된 학교와 학생들의 구도를 타파해야 한다는, 분명 언젠가 실현되어야 할 일이지만, 대학을 시궁창 같은 삶의 유일한 탈출구로 여기며 학창시절을 보내온, 그것도 시험이 한 달가량 남은 이에게 갑자기 이미 존재하는 구도를 박살 내라고 주문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영화는 그 대신 구도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와 관계를 묘사함으로써 눈 앞에 닥친 폭력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맞설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첸니엔과 샤오베이가 연관된 사건으로 인해 학교폭력 방지법이 제정되었다는 자막이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물론 실화 바탕 영화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결국 구도의 폭력을 살아낸 이의 존재를 통해 다른 변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다만 영화가 이를 그려내는 과정이 완전히 매끄럽지는 않다. 영화는 주동우와 이양천새 두 배우의 연기에 감정적인 측면 대부분을 맡겨버린다. 종종 등장하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중화권 호러영화 같은 정신없는 편집은 산만하며,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 또한 트리거 포인트로 작용한다.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을 피해가지는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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