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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02. 2020

<라스트 오브 어스 2>에 대한 잡생각

*게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작의 엔딩, 그러니까 조엘이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동충하초에 면역이 있는 소녀 엘리를 해부해 백신을 제작하려는 파이어플라이의 시도를 거부하고, 수술을 진행하려던 의료진을 몰살한 뒤 마취상태의 엘리를 데리고 떠난 것에서 4년이 지난 시점에서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시작된다. 엘리와 조엘은 잭슨이라는 생존자들의 마을 공동체에서 생활한다. 이들은 주기적인 순찰을 통해 마을 주변의 감염자들을 제거하며 생활한다. 마치 서부극에 등장하는 마을처럼 묘사되는 이들의 공간 인근에 한 무리에 생존자들이 접근한다. 이들을 이끄는 건은 애비, 그의 아버지는 4년 전 조엘에게 죽임을 당한 파이어플라이의 의사이다. 애비는 조엘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엘리는 그 광경을 목격한다. 엘리는 애비에게 복수하기 위해 애비와 그의 그룹인 WLF(워싱턴 해방 전선)이 있는 시애틀로 향한다. 


 로드무비의 형식을 지닌 전작과는 달리, <라스트 오브 어스 2>(이하 <라오어2>에서 엘리가 움직이는 목표는 확실하다. 사계절을 거치며 미 대륙을 횡단했던 전작이 조엘과 엘리의 동행을 통해 성장과 사랑이라는 테마를 내세웠다면, 이번 작품의 테마는 게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닐 드럭만의 말처럼 증오와 복수다. 이 지점에서 이번 게임은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서 게임을 비난하는 이들이 싸잡아 비난하는 지점, 가령, 엘리의 레즈비언 정체성이라던가 근육질 거구의 여성인 애비의 외모, 엘리의 잭슨 카운티 그룹과 애비의 WLF 그룹과는 또 다른 사이비종교 그룹인 세라파이트 소속의 어린 아이 레브의 트랜스젠더 정체성 등은 굳이 반박할 가치도 없다. 스토리에 개연성이 없다는 지점이라던가, 엘리가 시애틀을 돌아다니다 마주치는 프라이드 플래그의 존재 이유를 묻는 비난 지점도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피상적인 비난에 그친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나 2016년 <고스트버스터즈> 등에서도 있어왔던 “정치적 올바름이 작품을 망친다”는 구호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며, <라오어2>의 문제점이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작품을 향한 비난의 근원이 게임의 정확이 절반 지점,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가 엘리에서 애비로 전환되는 순간에 있다는 점만이 중요하다. 

영화를 열망하는 AAA게임

 게임이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작 중 주인공의 행동을 플레이어가 결정한다는 것에 있다. 단순한 이동부터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는 등의 전투 행위, NPC나 다른 유저와의 상호작용 등, 플레이어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동시에 캐릭터의 경험을 함께 체험한다. 이는 굳이 <GTA> 시리즈와 같은 오픈 월드 형식의 게임이라던가, 플레이어의 매 선택이 게임의 엔딩을 결정하는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아우터월드>와 같은 게임을 굳이 끌어오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게임의 기본 전제이다. 이 기본 전제에서 게임은 아무리 서사에 집중한다고 해도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른 방향성을 지닌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관객이 캐릭터의 이야기를 관람하게 된다면, 게임에선 캐릭터를 직접 플레이하며 플레이어가 서사에 개입하게 된다. 이는 <라오어> 시리즈처럼 선형적인 서사를 지닌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작에선 조엘(과 부분적으로는 엘리)을, 이번 작품에서는 엘리와 애비를 플레이어가 직접 플레이하며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하지만 너티독과 닐 드럭만은 <라오어2>가 영화와 같은 지위에 놓이기를 노골적으로 열망하고 있다. 발매일을 전후로 쏟아진 매체들의 리뷰를 살펴보자. 할리우드 리포터는 “진짜 던져야 할 질문은 이렇다: 영화가 언제쯤이면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 같은 게임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The real question is this: when will films catch up with video games like The Last of Us Part II?)”라며 <라오어2>의 스토리텔링을 오스카 후보에 오른 영화들과 비교했다. IGN은 “영화적인 스토리텔링(cinematic storytelling)”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국내매체인 게임메카는 <라오어2>의 스토리가 주는 불편함을 영화 <조커>나 <기생충>과 비교했고, 디스이즈게임은 <라오어2>가 너티독의 걸작이라며 “한 편의 훌륭한 영화를 잘 체험하고 이제 컨트롤러를 내려놓는다.”고 쓰고 있다. 메타크리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매체 중 소수의 매체만이 <라오어2>를 비판하지만, IGN재팬의 리뷰에서 볼 수 있듯 <라오어2>의 영화적인 측면을 긍정하고 있다. 


 <라오어2>에 쏟아진 호평들에서 주목해야 될 지점은 이 게임을 영화에 비유하여 게임 고유의 미학과 성취를 취득하려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를 <라오어2>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너티독과 닐 드럭만의 전작인 <언차티드 4: 해적왕과 최후의 보물>을 비롯해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워킹 데드>와 같은 인터렉티브 무비 게임들, 방대한 세계관과 오픈월드 형식을 통해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기를 제공하는 <GTA> 시리즈의 최근 두 편이나 <호라이즌 제로 던>과 같은 게임들 또한 영화와 비교되었다. <바이오 하자드>나 <파이널 판타지>처럼 영화화된 게임이나, <스파이더맨>이나 <스타워즈: 배틀프론트>처럼 영화 및 드라마, 애니메이션 컨텐츠를 게임화환 게임들 또한 같은 맥락 안에 놓여 있다. 근본적으로 게임도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이기 때문에, 스토리를 강조하는 게임이라면 이러한 비교를 피하긴 어렵다. 


 <라오어2>는 엘리가 복수의 대상인 애비와 대면하는 순간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가 애비로 전환된다는 지점에서 비난받고 있다. 물론 이 장면 이전에도 애비가 조엘을 살해하기 직전에 상황까지 두 번 정도의 전환이 등장한다. 하지만 시애틀에서의 사흘은 플레이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애비가 조엘을 살해한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다. 여기에서의 전환은 애비가 어떤 캐릭터인지 모른 채 진행된 초반부와 다르게 애비가 엘리의 친구 제시를 살해한 직후 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때문에 이런 상상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라오어2>가 캐릭터를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게임이 아니라,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저 관람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형식을 취했다면 지금과 같은 비난은 없었을까? 

애비(좌), 엘리(우)

<라스트 오브 어스 2>의 영화적 서사구조

 <라오어2>의 서사구조는 꽤나 단순하다. 엘리를 플레이하는 구간을 A, 애비를 플레이하는 지점을 B라고 명명한다면, <라오어2>는 ABAAAABBBABA의 순서로 진행된다. 각 구간은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시점만으로 전개되며, 플래시백으로 두 캐릭터의 전사가 등장한다. 엘리의 경우 조엘 및 조엘의 동생인 토미와 잭슨 카운티에서 보낸 시간들이, 애비의 경우 조엘이 죽이게 되는 아버지, 오언과 멜 등 WLF의 동료들과의 시간들이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이러한 구성의 전개는 다른 매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복수의 그룹과 인물이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작품들, 가령 <워킹데드>나 (더욱 복잡한 구도이지만) <왕좌의 게임> 같은 드라마들이 그러하다. 특히 <워킹데드> 시즌3에서 교도소 그룹과 우드버리 그룹의 대립이 <라오어2>와 유사한 방식의 서사구조를 통해 그려진다. TV드라마의 경우 관객이 캐릭터에 몰입하기는 하지만 항상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진 않는다. 자신이 몰입할 캐릭터를 여러 극 중 인물 중에 선택할 수도 있다. <워킹데드> 시즌3는 크게 두 그룹에 대해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복수의 주인공이 각기 그려내는 에피소드가 빼곡히 들어가 있기도 하다. 두 그룹을 이끄는, 그리고 그 그룹 내에서 주된 시점을 차지하는 인물(전자는 릭, 후자는 안드레아)이 각기 존재하지만, 여러 캐릭터의 존재와 TV드라마라는 매체 특성상 관객의 몰입과 동일시는 여러 캐릭터에 분산된다.


 반면 <라오어2>의 서사구조는 몰입과 동일시의 전환을 요구한다. 물론 전작에서도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전환이 등장하긴 했다. 대부분의 경우 조엘을 플레이하게 되지만 종종 엘리를 플레이해야 하며, 초반부에는 조엘의 어린 딸인 사라로 플레이해야 한다. 하지만 이 때의 전환은 아주 작은 부분이거나, 플레이하는 캐릭터와 항상 함께하는 다른 캐릭터를 플레이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라오어2>의 전환은 <GTA V>와 같은 게임과도 다르다. <GTA V>의 경우 3명의 캐릭터를 플레이할 수 있다. 다만 세 캐릭터의 이야기가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이야기 구조, 비선형적으로 스토리를 전개할 수 있는 오픈월드 게임의 특성상 캐릭터에 깊게 몰입하거나 동일시하는 경우가 적다. 애초에 세 캐릭터에 동일시하기엔 인간 말종 같은 인물들이기도 하다.


 반면 <라오어2>는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감정적 몰입을 요구한다. 전편을 플레이했던 이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엘리에 몰입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플레이어는 자신이 플레이하는 엘리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다. 다만 플레이어를 캐릭터에 몰입시키기 위한 방법에서 게임보단 영화나 TV드라마에 가까운 방식을 취한다. 서사를 선형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게임이지만 서사의 중요한 국면 대부분을 컷씬으로 처리해버리기 때문이다. 조엘이나 제시, 오언, 멜 등 주요 조연급 캐릭터의 죽음, 엘리와 디나, 애비와 오언 사이의 애정관계 등이 묘사되는 장면에서 플레이어는 중요한 사건들에 개입하기보단 관람하게 되는 위치에 놓인다. 중요한 국면 중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있는 부분은 애비를 플레이할 때 엘리와 벌이는 싸움, 그리고 엘리를 조작하며 애비와 혈투를 벌이는 마지막뿐이다. <라오어2>는 ‘복수’라는 테마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두 구간을 제외하면 모든 파트를 관람할 것을 요구한다. 플레이어는 엘리가 잭슨 카운티의 아이들과 눈싸움을 한다거나 애비가 아버지와 함께 덫에 걸린 얼룩말을 풀어주는 등의 사소한 구간을 통해 캐릭터에 다가갈 수 있지만, 서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에서는 관람자의 위치로 튕겨져 나온다. 플레이어는 컷씬을 통해 관람한 감정선을 그 이후의 플레이를 통해 리액션하며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영화의 본질을 숏과 숏 사이의 리액션, 즉 몽타주로 본다면, <라오어2>가 감정적 몰입의 측면에서 택한 전략은 영화의 몽타주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나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처럼 스토리의 비중이 높은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 게임과도 다른 방식이다.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는 선택의 순간을 플레이어에게 넘김으로써,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다른 컷씬을 리액션으로 배치한다. 너티독의 다른 흥행작인 <언차티드> 시리즈만해도, 네이선 드레이크를 플레이해 전투나 퍼즐 등을 진행하고 그 이후의 구간이 컷씬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라오어2>의 경우 플레이어가 엘리나 애비를 플레이한 뒤 찾아오는 컷씬에 비해, 이미 주어진 컷씬에 대한 리액션을 플레이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컷씬이 플레이와 플레이 사이를 채우는 것이거나,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대한 리액션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닌, 플레이어가 컷씬에 대한 리액션을 플레이하는 것이다. 때문에 굳이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와 비교하지 않아도, 플레이어가 스토리에 개입할 여지는 극적으로 줄어든다. 세미 오프월드 형식을 취한 부가적인 탐험 요소 또한 엘리나 애비의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이 속한 세계에 대한 설명만을 제시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의 컷씬과 플레이 구간의 구분을 두는 것은 플레이어의 태도에서 관람자의 태도로 플레이어를 튕겨져나오게 함과 동시에, 더 적극적으로 감정적 몰입을 요구하는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영화의 몽타주 방법론을 모방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리액션을 플레이하게 하면서 감정적 몰입을 요구하지만, 결국 컷씬을 통해 전개되는 서사에서 플레이어는 관객으로 다시금 위치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작에서 조엘을 경유해 엘리에게 감정이입하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엘리에게 몰입하고, 애비를 플레이하는 구간에선 그 반대의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불쾌해진다. 게임메카가 <라오어2>를 <조커>나 <기생충>처럼 불쾌해지는 영화와 비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게임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감각, 가령 <콜 오브 듀티: 모던 워 페어 2>의 공항 테러 시퀀스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며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이나, <데스 스트랜딩>에서 물품을 배송하며 체험되는 감각, <언차티드 4>의 카체이싱 시퀀스와 같은 쾌감의 체험과 <라오어2>의 불쾌함은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라오어2>의 플레이어는 자신이 전작에서 동일시했던 조엘을 죽인 애비를 플레이하기 때문에 불쾌하다기보단, 애비의 시점을 통해 관람해야하기 때문에 불편해한다. 이 지점에서 “복수의 순환이라는 사실”을 오직 제작진만이 알고 있다는 듯한 교조적인 태도라는 허지웅의 비판이나, “비극적 아이러니를 담아낸 위대한 속편”이라는 위근우의 옹호는 <라오어2>를 게임보단 오로지 서사라는 렌즈를 통해서 납작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마 두 사람이 <조커>나 <기생충>에 대한 코멘트를 말할 때 두 영화에서 해석의 근거를 찾는 방식과 유사할 것이다. 게임메카의 평가처럼 <라오어2>가 불쾌한 영화들을 연상시킨다면, 왜 플레이어를 불쾌하게 만드는 게임이 아니라 불쾌하게 만드는 영화와 비교하는지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왜 영화와 닮으려 하는가?

 “영화 같다”라는 말은 이제 긍정적인 의미의 관용어로 굳어졌다. <라오어2>는 물론 전작인 <라오어>에도 “영화 같다”는 관용어는 호평을 위한 수사로 사용되었다. 컷씬은 80년대 아케이드 게임에도 있었지만, 20년 전쯤 블리자드가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선보이며 영화적 구성은 자본이 많이 투입된 AAA 게임의 스토리 전개를 위한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 유튜브 채널 ‘Game Maker’s Toolkit’을 운영하는 마크 브라운이 “라스트 가디언 그리고 게임만이 가진 언어”(https://www.youtube.com/watch?v=Qot5_rMB8Jc&t=626s)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오어> 시리즈는 조엘과 엘리, 엘리와 애비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의 방법론을 빌려왔다. 그리고 이는 “영화 같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같은 영상에서 마크 브라운은 <라스트 가디언>을 게임의 언어를 잘 활용한 사례로 꼽으며, 게임의 언어의 핵심을 ‘상호작용’이라 말한다. <라스트 가디언>이 소년과 괴물 사이의 유대감을 쌓는 방식은 게임 플레이 과정에서 두 캐릭터의 상호작용이 발생함으로 가능해진다. 반면 <라오어> 시리즈에서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은 컷씬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게임 플레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1편에서 조엘을 플레이하며 엘리와 함께 이동하는 구간을 살펴보자. 플레이어는 조엘을 조작하고, 엘리는 조엘을 뒤따라오며 좀비와 적군을 상대하거나 회피한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엘리의 생존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엘리가 적이나 좀비에게 공격을 당해 도와줘야 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고, 엘리가 총을 처음 사용하는 과정은 컷씬을 통해 처리된다. 두 캐릭터 사이의 유대감은 컷씬을 통한 관람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지점이 <라오어2>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인물은 조엘이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주체성을 투사하는 것 역시 조엘일 수밖에 없으며, 둘 사이의 유대감은 체험된 것이 아닌 관람한 것의 영역에 머문다. 때문에 <라오어2>를 플레이한 이들은 조엘의 죽음을 관람하며 게임에서 튕겨져 나와 반발하게 된다. 조엘이 살해되는 장면은 완전히 조작 불가능한 컷씬의 영역에서 진행되며, 플레이어는 애비의 동료에게 붙잡힌 엘리가 발버둥치는 모션조차 취할 수 없다. 체험된 것이 아닌 관람된 유대감은 조엘이 아닌 엘리에게 플레이어가 자신의 주체성을 투사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조엘을 살해한 애비에게 플레이어가 몰입하는 것 또한 가로막힌다. 


 컷씬이 성공적으로 게임에 녹아 든 사례로 너티독의 <언차티드4>를 꼽을 수 있다. <툼레이더>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이 시리즈는 속편이 거듭됨에 따라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마냥 스케일을 키우고 있고, 이와 더불어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액션 시퀀스들이 빼곡히 포진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시장에서 산동네와 강을 거쳐 항구에서 끝나는 15분가량의 카체이싱 시퀀스는 TPS(3인칭 슈팅게임), 시네마틱 세트플레이, 컷씬이 뒤섞인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분량이 차량을 운전하고 적과 총격전을 벌이는 TPS 구간이지만, 적절하게 등장하는 시네마틱 세트플레이와 컷씬은 게임 플레이에 영화적인 스펙터클을 더한다. 즉 이 시퀀스에서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와 관람이 (분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유사한 강도로 경험한다. 주로 새로운 미션을 제시하는 데 컷씬이 쓰여온 것처럼, 이 시퀀스에서의 컷씬은 새로운 상황을 제시하는데, 가령 자동차들의 충돌이나 거대한 폭발 등에서 등장한다. 시네마틱 세트플레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구간을 TPS의 방법으로 진행하는 대신, 거대한 스펙터클이 묘사되는 장면에선 그것을 적절히 관람할 수 있도록 게임 플레이의 영역을 최소화하고 관람을 유도한다. <언차티드4> 외에 시리즈의 다른 작품 또한 관람하는 구간과 플레이하는 구간을 적절하게 뒤섞어 영화적 스펙터클과 게임플레이의 절충안을 선보인다.


 반면 <라오어> 시리즈는 그렇지 못하다. 닐 드럭만과 제작진의 고민은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에 치중되어 있다. 1편에서 구축된 게임플레이 자체는 훌륭하다. 소리에 민감한 좀비를 피해 잠입하거나 좀비들을 모두 처리하고 공간을 지나치는 두 가지 선택지를 주는 것, 소리를 통해 좀비를 비롯한 적들을 감지하는 시스템, 총알을 비롯해 생존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수집하고 그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것(1편에선 만화책, 2편에선 만화 캐릭터 카드와 동전)을 통해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등은 플레이어를 좀비 아포칼립스가 벌어진 2033년의 시공간으로 데려가기에 충분하다. <라오어2>에서도 이러한 게임플레이 시스템은 몇몇 구간이 세미 오픈월드처럼 확장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엘리와 애비에 따라 사용하는 무기의 차이가 있는 정도이다. 다만 여기엔 상호작용이라는 게임의 언어를 통한 스토리텔링이 결여되어 있다. 굳이 게임플레이를 하지 않더라도, 컷씬을 관람하는 것만으로 조엘과 엘리의 유대감이나 엘리와 애비의 서로를 향한 복수심과 후회 등은 충분히 전달된다. 플레이어와 캐릭터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체험되는 유일한 감각은 폭력일텐데, 그마저도 주요 캐릭터와 연관된 폭력은 앞서 언급한 엘리와 애비 사이에 벌어지는 두 사건을 제외하면 모조리 컷씬으로 처리된다.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하는 대상은 상대 캐릭터가 아니라 몰개성의 AI 적들일 뿐이다.


 <라오어2>를 클리어한 이후 PS4로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와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를 플레이했는데, 이 두 게임에서의 폭력과 <라오어2>의 폭력은 게임플레이의 차원에서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유사한 외모의 AI 적들을 학살하고 스토리의 다음 단계로 전진할 뿐이다. <라오어2>는 학살 대신 잠입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긴 하지만, 꽤 많은 구간, 특히 좀비가 아닌 WLF나 세라파이트를 상대하는 구간에선 학살을 택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그렇다면 <라오어> 시리즈의 관건은 폭력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을 어떻게 스토리텔링과 접목시키느냐에 있다. 하지만 <라오어> 시리즈는 게임플레이의 상호작용 대신 영화적 방법론에 스토리를 외주화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작년 <데스 스트랜딩>이 맞닥뜨렸던 혹평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데스 스트랜딩>의 경우 적지 않은 분량의 컷씬(초반과 후반에 등장하는 컷씬의 러닝타임만 장편영화 분량이다)의 존재와는 별개로 게임플레이와 게임의 테마 사이의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단순히 컷씬의 분량을 근거로 들어 <데스 스트랜딩>을 “영화 같다”고 말하는 것은 게임에서 게임플레이를 간과하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라오어2>의 스토리텔링과 테마는 게임플레이와 유리되어 있다. 너티독은 <라오어2>의 스토리를 영화처럼 전달하고, 평론가와 유저들도 영화처럼 게임을 평가한다. <라오어2>를 호평하는 데 영화를 끌어오는 평론가들은 게임이 무엇을 체험하게 하는 지를 이야기하는 대신 무엇을 보여주는 지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다. <라오어>의 성공이 그러한 요소 때문이었다면, <라오어2>는 그러한 요소만을 강조하고 있다. 섐블러와 래트 킹이라는 새로운 좀비의 등장이라던가, 엘리가 조엘을 따라 기타를 연주하는 구간을 어색하게 플레이하도록 하는 장면은 이야기와 동떨어진 게임플레이를 어떻게든 강조해보려는 발버둥에 가깝다.

나가며

 물론 <라오어2>를 재미없게 플레이했다는 것은 아니다. 전편을 즐겁게 플레이했던 사람으로서 이번 작품에서 엘리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었고, 그것에 대한 만족감을 얻었다. 다만 중요한 분기점들을 모두 컷씬으로 처리해버리는 게으름이 다시 한번 아쉬웠을 뿐이다. 게임을 영화와 엮으려는, 더 나아가 게임을 영화로 명명하려는 시도들이 종종 일어나긴 한다. 가령 <스타크래프트2>의 확장팩 <군단의 심장>의 시네마틱 컷씬을 영화 기록 사이트인 레터박스에 영화로 등록해둔다거나, 루카 구아다니노가 2019년 연말 리스트에서 <데스 스트랜딩>을 언급하는 것과 같은 일 말이다. 예술 장르로 분류되는 것 중 영화와 게임은 유사한 위치에 놓여 있다. 둘 모두 서사, 이미지, 음악 등의 총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술 등에 비해 접근성이 좋고, 대중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게임에 비해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기생충>의 대중적 흥행은 황금종려상부터 오스카 작품상까지 이어진 수상 경력이라는 맥락이 덧붙여져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예술작품’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사례는 <기생충> 외에도 수없이 많다. 영화는 탄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적 오락과 진지한 예술 사이를 오가며 두 영역이 겹치는 장소로 존재했다.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국제영화제는 예술영화들이 집결함과 동시에 전세계에서 제작된 상업영화들의 판권이 거래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90여년에 가까운 영화제 및 영화 시상식의 역사는 예술에 대한 영화의 인정투쟁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


 반면 게임은 그 어원과 태생부터 오락이다. “영화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시네필이라는 근엄한 호칭을 부여받지만 “게임에 중독되었다”는 말은 일상생활에 대한 불능으로 이어진다. 물론 게임을 예술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종종 있어왔다. 1989년 <뜨거운 회로: 비디오 아케이드 Hot Circuits: A Video Arcade> 전시부터, 비디오게임을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과 엮는 ‘아트 게임’ 담론까지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프랑스와 미국은 게임에 다른 예술 생산물과 동일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게임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락과 여가의 측면이다. 게임을 예술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임 업계가 택한 것은 게임을 또 다른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와 결부시키는 것이다. 두 매체가 지닌 여러 공통점을 바탕으로, ‘영화 같은 게임’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인정받는 것, 이것이 블라자드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표지로 삼아 <라오어2>의 닐 드럭만을 비롯한 여러 개발자와 크리에이터들이 택한 길이다. 그리고 ‘영화 같음’에 천착한 나머지, <라오어2>를 비롯한 많은 게임들은 게임플레이보다 컷씬을 통한 스토리텔링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라오어2>의 논란은 그것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게임을 게임의 영역에 한정지으려는 것은 아니다. 게임과 다른 예술 장르의 영역을 뒤섞는 시도는 이미 많이 등장했다. 다만 게임이 스스로의 미학적 성취를 영화적 연출에 위탁하고, 그것이 표면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라오어2>를 둘러싼 대부분의 쓰잘데기 없는 논란은 도리어 이 게임에 쏟아진 호평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수없이 남발되는 ‘영화적’이라는 수사 속에서, 게임에서 ‘영화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재고해봐야 할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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