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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25. 2020

<여름날> 오정석 2019

 승희(김유라)는 고향 거제로 내려온다. 그곳에 있는 것은 어머니의 빈자리와 삼촌의 집뿐이다. 그는 삼촌의 집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낸다. 고향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낚시를 해보기도 한다. 그는 낚시터에서 만난 거제 청년(김록경)과 함께 거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본다. 오정석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여름날>은 별 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랜 서울살이를 하다 휴가계를 내고 거제에 내려온 승희의 하루하루를 보여준다. 하루의 마무리와 시작은 당연하게도 취침과 기상이다. 영화는 승희를 쫓으며 그의 시간을 담아낸다.

 승희가 보내는 시간은 휴가도, (홍보사의 시놉시스처럼) 유배도 아니다. 승희와 거제 청년이 찾는 폐왕성은 조선시대에 거제가 유배지였음을 알려주지만, 승희는 유배지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거제에 보내진 것이 아니다. 제 발로 찾아왔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찾아 거제에 내려온 것은 단순히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의 추억을 상기시킨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다. 승희가 원하던 것은 누군가보다는 그저 혼자 있을 수 있는 빈자리이다. 오랜만에 만난 삼촌, 할머니, 고향 친구의 얼굴은 반갑지만, 승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승희는 혼자가 되길 바란다. 모든 인물의 목소리가 대사와 상관없는 소리, 가령 행인의 말소리, 개가 짖는 소리, 바람이나 물소리, 벌레소리 등과 비슷한 음량으로 존재하는 와중에 승희의 행동을 정해주려는 삼촌의 말만은 또렷하게 들린다. “서울에는 언제 올라갈 거니?”라는 삼촌의 물음은 수차례 반복되고, 혼자 있겠다는 승희의 말에도 왔으니 밥은 같이 먹자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펜션을 운영하는 승희의 친구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두고 맥주를 마시자는 여행객들의 제안에 승희를 동참시킨다. 그들은 승희와 다른 깊이에 서서 승희의 위치로 침입한다. 승희는 자신만의 빈자리를 얻지 못한다.

 거제 청년은 화면에서 승희와 유사한 깊이에 위치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분식점에서, 횟집에서, 낚시터에서, 폐왕성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앉거나 서로의 화면 속 깊이를 교환한다. 이들이 공유하고 교환하는 것은 빈자리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흔히 연애를 전제했을 법한) 익숙한 영화 속 남녀의 대화라기보단 서로의 영역에서 거리를 두려는 일상적 대화에 가깝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혼자라는 것뿐이다. 기교와 개성으로 무장한 최근의 독립영화 사이에서 <여름날>은 별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영화는 승희가 ‘혼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만 욕심을 부린다. 거제 청년은 승희가 혼자 있을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혼자’로써 승희의 주변에 위치한다. 유배지인 폐왕성에 혼자 다시 오른 승희는 드디어 아무도 없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드디어 혼자가 되고, 생각보다 쉽게 얻어낼 수 없는 혼자만의 순간, 영화는 자신이 탐낸 단순한 욕심을 채우는 순간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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