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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25. 2020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

*스포일러 포함


 남매인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는 아빠(양흥주)와 함께 할아버지(김상동)의 집에서 방학을 보내게 된다. 어느새 고모(박현영)까지 합류해 다섯 식구가 한 집에 머물게 된다. 표면 상의 이유는 몸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함처럼 느껴지지만, 아빠의 속내를 옥주는 알 수 없다.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은 두 남매(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빠와 고모가 함께하는 장면은 옥주와 동주가 함께 있는 장면만큼의 비중을 차지한다. 할아버지는 혈연으로 맺어진 두 남매를 모이게 하고, 혈연이 아닌 이들(옥주와 동주의 엄마, 고모의 남편)은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혼과 별거는 혈연이 아닌 가족을 순식간에 (어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식구가 아닌 존재로 만든다.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의 이야기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가족과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이다. 두 남매와 할아버지가 머무는 집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나 봤을 법한 2층짜리 목조 주택이고, 고추와 포도가 열리는 우거진 마당은 실재보다 거대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가족이 모여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는 모습, 할아버지의 생신 때 재롱을 부리는 손자의 모습 등은 어렴풋한 가족과의 추억을 슬며시 꺼내 온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 정도에서 이것들은 부정된다. 옥주와 함께 자던 고모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갓난아기일 때 엄마가 나를 안고서 횡단보도를 막 뛰어간다? 진짜 생생하거든. 그래서 그게 어렸을 때 기억인 줄 알았어. 근데 기억이 아니라 꿈인 거잖아.”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을 찾은 옥주는 고모가 말한 것과 유사한 상황을 겪는다. 장례식장을 찾은 엄마와 만난 옥주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동주의 재롱을 보며 웃는 이 장면은 명백히 꿈이다. 어느새 잠든 옥주는 엄마가 다녀갔다는 동주의 말과 함께 엄마가 두고 간 선물만을 받는다. 옥주가 고모의 나이가 되어서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고모의 꿈 이야기와 옥주의 꿈은 혈연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가족의 불가능성을 논의한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공간인 할아버지의 집을 다시 떠올려보자. 집에 머물기로 결정한 첫날 잠시 밤 산책을 다녀온 고모가 열쇠가 없어 옥주에게 전화를 건 것을 제외하면, 다섯 명의 구성원은 이 집을 드나듬에 있어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집을 나서는 것이 불편한 이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다. 그는 병원에 갈 때만 집 밖을 나설 수 있다. 이 집에는 혈연이 아닌 이들은 들어오지 못한다. 이혼한 아내나 별거 중인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 심지어 동주가 엄마의 선물을 받아 돌아왔을 때 옥주는 불같이 화를 낸다. 물론 집의 주인이 할아버지이고 옥주와 동주의 엄마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여 이 집이 가부장의 공간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공간을 정의하는 것은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낼 것인지, 할아버지 사후에 집을 팔 것인지 등과 관련한, 즉 돈과 관련한 일들이다. 혈연이 아닌 가족은 들어오지 못했던 공간에 들어오는 유일한 타인은 집을 보러 온 사람이다. 병원이 아닌 이유로 할아버지가 집 밖을 나가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언뜻 할아버지의 집이 가족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혈연이 아닌 가족까지 포괄하는 공간은 결국 장례식장이다. 돈으로 환원 가능한, 언제든지 처분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집은 고모와 옥주의 꿈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희망, 꿈, 추억, 기억, 애정, 관계, 갈등은 분명 있는 것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꿈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남매의 여름밤>은 보편적 유년시절, 보편적 가족의 상이란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의외로 반가족적인 영화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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