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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29. 2020

2020-08-29

1. Rest In Peace and Power.


2. EIDF를 통해 15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아래는 간단한 후기.

<호랑이와 소> 김승희 2019

영화는 호랑이띠 엄마와 소띠 딸의 이야기이다. 엄마는 딸을 홀로 키웠다. 딸을 홀로 키운 엄마의 이야기는 딸이 바라본 엄마의 이미지, 혹은 자신 처럼 아빠 없이 엄마와 둘이 살아온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충돌한다. 연필로 그린 애니메이션 이미지들은 모녀 가정의 외부와 내부를 뒤섞다가도 경계짓는다. 호랑이와 소 사이의 우위 또한 계속 뒤바뀐다. 모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2018년 소개된 조한나의 <뺏속이 무거워서 꺼내야 했어>가 떠오르기도 하는 작품. 

<시네마 파미르> 마틴 폰 크로그 2020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위치한 영화관 '시네마 파미르'를 카메라에 담는다. 내전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 곳에서 꿋꿋이 영화관을 운영하고,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 영화관의 '보스'와 운영 스탭들은 영화관이 전쟁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올 수 있는 도피처가 되길 꿈꾼다. 물론 운영은 쉽지 않다.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관객들은 공공장소 예절을 습득하지 못했고, 관객과 관객, 관객과 스탭의 마찰은 종종 폭력적인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시에 영화관은 공공 대피소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영화관 인근에서 폭탄이 터진 상황, 스탭들은 당황한 사람들이 영화관 밖으로 쏟아져 나가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영화관 문을 걸어 잠그고 관객들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시네마 파미르는 영화에서 영화관의 중요성이 점점 소멸되는 와중에 영화관이란 어떤 장소인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아프가니스탄 또한 온라인이나 DVD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 게 보급화되어 있다는 언급이 극 중에 등장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영화관을 찾는다. 영화관의 경험을 교환 불가능한 가치로 치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관은 여전히 관객의 정신적 대피소의 역할을 담당하고 (혹은 담당할 수) 있다.

<아워 타임머신> 레오 치앙, 양 순 2019

예술가인 말레온은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실물크기 인형극 <아빠의 타임머신>을 기획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곁에서 이 과정을 지켜본다. 아버지는 말레온이 만든 실물크기 인형들을 '로봇'이라 부르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붙어 조작해야 하는 인형지지 자동기계(Automata)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인형들은 인간이라는 자동기계가 자동적으로 죽음을 직시하도록 한다. 영화가 인용한 H.G. 웰즈의 말처럼, 여기서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꿈꾸는 타임머신이 된다. 말레온이 기획한 공연의 요소들을 뜯어보는 일은 흥미로웠지만,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부성애의 순환을 다루는 부분은 다소 뻔하게 다가왔다. 

<아쇼> 자파르 나자피 2019

이란의 양치기 소년 아쇼는 영화를 좋아한다. 친척 누나가 준 태블릿에 잔뜩 담긴 영화들을 매일같이 본다. 그는 "<라라랜드>에서 오스카를 받을만한 것은 엠마 스톤 뿐이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외설적인 유럽 영화는 안 본 다는 아빠의 말에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는 1000번 정도 보는 사람이"라며 타박하기도 한다. 배우를 꿈꾸는 아쇼는 현실에서 연기를 해야한다. 그는 어린 시절 가족의 뜻에 따라 약혼자가 정해지는 전통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의 약혼자로 정해진 소녀를 무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쇼는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차별과 폭력이 자연인 곳에서, 아쇼는 "영화를 많이 보는 순수한 아이" 같은 수사와는 한참 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보는 아쇼의 눈과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문화적, 전통적 환경을 보는 아쇼의 눈은 다소 유리되어 있다. 영화는 아쇼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혹은 뿌리깊은 가부장제에 가로막혀 눈 앞에서 미끄러져 버리는 이미지들로 남게 될까?

<수녀님들이 물었습니다> 고든 퀸, 제럴드 테마너 1968

어느 일요일, 두 명의 수녀가 시카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영화는 '시네마 베리테' 형식을 만들어낸 장 루슈의 <어느 여름의 연대기>와 같은 구성을 취한다. 감독 대신 두 명의 수녀가 질문하고, 1961년의 파리가 아니라 1968년의 시카고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두 수녀가 무작위로 만난 이들의 답변은 천차만별이다. 직장에서는 행복하지만 사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남성, 행복이라는 단어와 베트남전을 연관시키는 청년, 행복의 조건을 되짚어보는 첫 번째 흑인 백만장자... 수 많은 사람들의 답변을 거쳐 질문은 관객에게 되돌아온다. 

<묻혀진 죽음> 로즈 모티머 2019

영화는 극우주의가 다시 부상하는 유럽의 현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1940년대 폴란드에서 생매장당한 집시 여성의 이야기부터 네오나치의 증오범죄까지를 쫓는다. 다만 느릿한 전개와 인터뷰 및 추상적인 재현 영상으로 채워진 구성이 다소 진부하게 다가온다. 종종 영화가 아니라 글이었다면 더욱 좋았겠다는 영상들이 있는데, 이 영화도 그 중 하나로 느껴졌다. 

<무대 뒤의 오로라> 스티안 세르보스, 벤야민 랑엘란 2019

국내 관객들에겐 <겨울왕국2>의 OST에서 정령 목소리를 맡은 가수로 알려진 오로라가 두 번째 앨범을 발매하기 위한 과정에서 겪은 고민과 갈등을 담은 작품...이라는 설명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는 영화였다. 

<고르바초프를 만나다> 베르너 헤어조크, 안드레 싱어 2018

다큐멘터리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베르너 헤어조크가 소련의 마지막 국가원수인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만나 진행한 인터뷰를 담은 작품이다. 고르바초프의 어린 시절부터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 당시에 대한 그의 생각,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 등을 담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생각들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던 영화. 인터뷰 내용에 맞춰 아카이빙된 푸티지를 사용하는 등의 구성은 단조롭기만 했다. 

<그녀들의 무임승차> 아르노 빗시 2019

영화는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화물열차에 탄 세 명의 여성을 쫓는다. 로드무비 형식의 영화는 세 여성이 왜 떠돌아다니는지를 담아내려 하지만, 솔직히 이 영화보단 <웬디와 루시>를 다시 보는 게 훨씬 이로울 것 같다. 

<시간의 편린들> 크리스티네 브리에데, 오드리어스 스토니스 2018

영화는 발트 해 지역 뉴웨이브 운동을 이끌었던 영화 감독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사실 영화가 담으려는 발트 해 지역 뉴웨이브 운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약간은 공부하는 느낌으로 본 작품.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며> 크리스 브린가스 2019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영화관 '타임 시네마'와 관련한, 은퇴를 앞둔 영사기사와 중년의 여성 배우 각각의 이야기를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 마닐라의 가장 오래된 영화관인 타임 시네마에 얽힌 기억을 풀어내는 두 사람의 말들은 70~80년대 호황을 누렸던 필리핀 영화계의 쇠퇴의 기억과도 같다. 19분의 짧은 러닝타임은 번영과 쇠퇴의 기억을 두 사람의 말을 통해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뻔한 수사지만, 영화관을 찾는 모두가 지녔을 법한 뻔한 추억들은 그곳의 소멸을 앞두고 하나의 역사가 된다. 

<JR의 벽화 프로젝트> 타샤 판 잔트 2020

너무나 제목 그대로의 영화라서 딱히 할 말이 없다. 다만 JR의 작업은 코로나 시대엔 불가능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관계미학, (물리적인) 관객참여 작품의 붕괴.

<타운 오브 글로리> 드미트리 보골류보프 2019

영화는 러시아의 어느 시골 마을인 옐냐를 보여준다. 아이들의 최대 학업 목표는 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것이다. 이곳의 수행평가는 총기 분해결합이다.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어온 소도시의 사람들은 푸틴이 과거 러시아의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 믿는다. 이들은 돌아오지 않을 붕괴될 과거의 영광을 쫓는다. 함께 상영된 <묻혀진 죽음>이 극우주의의 부활과 우경화된 유럽으로 인한 피해자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타운 오브 글로리>는 우경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자라나는지, 그 과정을 3년 간 촬영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올해 EIDF를 통해 본 작품 중 가장 힘든 작품. 

<스페이스 독> 엘사 크렘저, 레빈 페터 2019

영화는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명체인 라이카가 유령이 되어 모스크바를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카메라는 두 마리의 길거리 개들을 쫓고 이들의 일상과 우주에서 죽음을 맞이한 라이카가 접했을 풍경, 과거의 푸티지 등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즉, 영화는 라이카가 실험체가 되어 우주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현재를 떠돌기까지의 과정을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주경쟁이라는 명목 하에 희생된 동물들, 더 나아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된 동물들의 생명을 재고하도록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모스크바의 길거리 개들이 길고양이를 물어뜯는 과정을 5분 가량이나 보여줄 필요가 있나 싶었다. 길지 않은 러닝타임임에도 "굳이??" 싶은 장면들이 적지 않았던 영화.

<허니랜드> 류보미르 스테파노프, 타마라 코테프스카 2019

단연 EIDF 최고의 작품.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봉업을 하는 50대 여성이 살아가는 마을에 한 유목민 가족이 도착한다. 유목민의 가부장은 자기도 양봉업을 해보겠다며 나서지만 그의 모든 선택은 실패한다. 양봉은 단순히 벌을 키우고 꿀을 수확하는 것이 아니다. 소, 돼지, 닭, 양을 기르는 것 또한 어렵지만, 벌은 사람이 가축화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역 생태계에서 벌을 분리해내 꿀을 얻는다는 발상은 불가능에 가깝다. 유목민 가족의 가부장은 불가능한 발상을 실현하려 한다. 그의 모든 시도는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선택 하나하나는 타자을 자신의 발 밑에 두려는 탐욕의 발현이다. 여기서 타자는 벌을 비롯한 자연 뿐 아니라 그의 자식들, 그가 정착한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 등 그의 주변에 놓인 거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환대를 붕괴시키는 탐욕, 원치 않는 돈을 벌기 위한 선택. <허니랜드>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선택들을 가장 우회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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