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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05. 2020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픽션

게임의 허구와 영화의 허구 사이의 중첩과 실천

*이 글은 지난 10월 4일 진행된 씨네미루의 [게임, 가상, 영화: 처음 보는 영화들] 상영회에서 배포된 글입니다.


 한국영화들은 유독 게임을 소재로 다루지 않는다. 반면 할리우드나 일본에서는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많은 게임 원작 혹은 게임을 소재나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엔 호러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대만영화 <반교: 디텐션>(2019)이 호평 받으며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e-스포츠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다루거나 게임의 형식을 취한 영화가 많지 않다. 망작, 괴작, 컬트영화라 불리는, 가령 장선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이나 박재범의 <씨어터>(2000) 같은 2000년대 초반의 몇몇 영화들만이 게임의 형식을 영화에 차용하고 있다. 최근 박광현의 <조작된 도시>(2017)라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과가 썩 좋진 못했다. 이 시도들은 왜 실패한 것일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영화 자체가 조악하기도 하지만, 게임의 외피만을 가져왔을 뿐 그 형식을 활용하진 못했다. ‘스타리그’가 언급되고 프로게이머가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며, ‘성냥팔이 소녀’가 현실로 튀어나온 게임의 NPC라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장선우의 전작 <나쁜 영화>의 괴상한 열화버전에 머물고 만다. <씨어터>는 ‘한국 최초의 고어영화’라는 타이틀에 집착했기 때문인지, 혹은 실없는 개그 욕심 때문인지, 극장에 갇힌 13명의 사람과 의문의 극장주가 벌이는 살인 게임이라는 요소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게임 내 클랜원들을 주인공과 조력자로 내세운 <조작된 도시>는 게임의 플레이 전략을 게임 밖에서도 활용한다는 점에서, 언급한 영화들 중 가장 적절히 게임의 요소를 끌어오고 있다. <조작된 도시>의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조작된 가상을 타파하는 방식으로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의 방법론을 사용한다. 다만 그것은 실제 세계에 중첩된 게임의 가상 세계가 아닌, 실제 세계에서의 활동을 위한 동력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영화와 게임은 모두 허구적 세계를 다루는 영상매체다. 때문에 두 매체에서 다루는 세계는 곧 가상이다. 그중 영화의 경우 대부분은 실제 세계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가령 <기생충>(2019)과 같은 영화가 얼마나 실제 세계를 잘 묘사했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가 얼마나 실제 세계에서 멀어졌건 간에, 그것은 영화를 제작하고 관람하는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실제 세계에 기반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면서 일종의 지리학적 게임을 벌인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에 나온 서울과 의왕시의 곳곳이 실제 지리와 얼마나 다르게 표현되었는가를 짜 맞춘다거나, <기생충>의 촬영지를 관광지로 지정한다던가 하는 등의 놀이, 혹은 그것을 빙자한 뻘짓. 반면 게임이 그리는 세상은 대부분 새롭게 그려낸 곳이다. 거대한 오픈월드 게임이더라도 그 세계는 평평지구 마냥 더 나아갈 수 없는 끝이 존재한다. 로스앤젤레스나 샌 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등을 모델로 삼은 [GTA 샌안드레아스](2004)는 나름의 유기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 세계는 결국 북미 대륙이 아닌 세 개의 거대한 섬으로 표현된다. 이는 두 편의 후속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레드 데드 리뎀션 2](2018)나 [호라이즌 제로 던](2017)처럼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할 정도로 광활한 세계를 구현한 게임들 또한 산과 바다로 막힌 한계가 등장한다. 영화에선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의 끝 너머를 상상해볼 수 있지만, 게임에서는 [마인크래프트](2009)처럼 거의 무한한 크기의 샌드박스 게임이 아니라면 그 끝 너머를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다. 게임의 지리학에서 지도 밖은 없는 공간이다. 그곳은 게임이 구현하지 못한 무(無)의 공간이며, 그렇기에 게임은 실제 세계를 모방한 허구적 세계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세 편의 영화가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영화 속 세계가 게임의 세계와 같은 지위의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 영화는 영화 속 실제 세계와 게임의 가상 세계 사이의 위계를 생성하고, 두 세계는 별도로 움직이는 이질적인 공간으로 다루어진다. 정리하자면, 영화와 영화 속 게임의 세계 양쪽이 모두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오는 상황만을 다루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가?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기 있다"라는 보드리야르의 유명한 지적처럼, 우리가 아는 세계는 시뮬라크르로 뒤덮여 있다. 즉 디즈니랜드와 같은 가상은 실제 세계가 가상임을 은폐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상이며, 우리의 세계는 대상의 복제의 복제만이 남은 세계, 고도로 기호화된 세계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닌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 그것을 은폐하는 가상을 본다.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이하 <그라이아이>)은 세계가 가상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이태원 해방촌에 사는 감독이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고](2017)를 플레이하다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용산 미군기지 내에 포켓스탑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플레이어가 실제 세계를 돌아다니며 포켓몬들을 잡는다는 설정의 이 게임은 증강현실을 통해 실제 세계 위에 가상을 중첩시킨다. 게임 내에는 아이템을 보급받을 수 있는 포켓스탑이 존재하는데, 이는 실제 세계의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기념비 등을 기반으로 위치 지어지며, 다수의 플레이어가 선택한 장소가 포켓스탑으로 지정된다. 때문에 용산 미군기자 안에 포켓스탑이 존재한다는 것은, 미군기지 내의 미군들이 [포켓몬고]를 플레이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표다. 카카오맵 등 국내 포털사이트 지도에는 녹지로 표시되는 용산 미군기지의 내부를 포켓몬고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그 내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이 발견한 기지 내부의 기념비는 대부분 전쟁, 제국주의, 그리고 미국과 관련된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무엇이 대한민국 용산에 위치한 기지를 미국으로 만드는가? <그라이아이>에는 촬영 크레딧이 없다.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포켓몬고]를 플레이하는 스마트폰의 녹화 화면, 선전영화, 용산 기지 및 평택의 캠프 험프리를 다룬 뉴스나 인터뷰, 전쟁을 묘사하는 루니툰 애니메이션, 카카오맵부터 구글어스까지의 다양한 지도 서비스 등의 이미지다. 그 중에는 기지 내부를 직접 보여주는 인터뷰나, 미군 병사들이 자신의 생활을 직접 설명하는 이미지도 섞여 있다. TV 리포터는 직접 기지 내부로 들어가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았지만 미군기지에는 존재하는 미국의 프랜차이즈 식당을 체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지 속을 보여준다고 그것이 기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지 인근의 도로에서 기지를 촬영한 이미지 또한 기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3D 모델링으로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될 기지의 조감도를 보여주는 이미지가 하나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기지의 미군들이 향수병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기지를 미국과 똑같이 만들어 두었다고 설명한다. 기지 안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텍사스 로드하우스의 직원은 이곳에서 식사하는 미군은 텍사스 로드하우스 미국지점에 있는 가족과 화상통화를 하며 저녁을 먹을 수 있고, 함께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미군은 미국과 다른 지형 및 토질을 지닌 한국의 땅을 개간해 미국에 있는 것과 유사한 골프장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수많은 영상을 통해, 혹은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두 눈을 통해 미군 기지를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한국에 위치한 미군기지라기보단 미국을 모방한 가상적 공간에 가깝다. 그곳에 놓인 기념비가 가상으로 뒤덮여 사라진 그 땅의 역사와 지금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기념비들은 [포켓몬고]를 통해 구현된, 현실의 지리학 위에 중첩된 게임의 공간 속 기념비(포켓스탑)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아닌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용산 미군기지와 <그라이아이>가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해 밝혀낸 미군기지라는 가상의 공간, 그리고 [포켓몬고]를 통해 현실 위에 중첩된 가상의 공간은 같은 위상에 놓인다. 1944년에 촬영된 선전영화의 한 장면부터 2019년에 녹화된 스마트폰의 게임 화면까지, 모든 이미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라도 무엇인가를 덮어쓴 허구적 세계의 이미지들이며, 그것들의 집합인 <그라이아이>는 세계가 가상임을 은폐하는 가상을 폭로한다. 이 영화는 용산 미군기지를 둘러싼 진실이라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혹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정책에 대한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비평에는 관심이 없다. 정여름 감독이 직접 쓰고 녹음한 내레이션은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불꽃놀이 소리를 듣고 용산 미군기지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고 말한다. 미군기지라는 이름으로 용산에 자리 잡은 가상의 미국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미군들이 타국에서 향수병을 느끼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진 가상인 것처럼, 가상은 자신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자신이 감추려는 것의 기호만을 내세운 채 비가시적인 자신의 존재를 감각하도록 한다. <그라이아이>는 그 감각에서 이물감을 느낀 감독이 가상의 영역 – 게임과 인터넷 – 에서 수집한 이미지들로 가상이라는 존재를 가시적 영역에 끌고 오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그라이아이>는 그리스 신화 속 ‘그라이아이’라는 존재를 빌어 비가시적인 가상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이미지)에 대한 픽션이다.


 물론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그라이아이>라는 작업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로 [포켓몬고]가 허구적 세계를 그려내는 대신 실제 세계의 지리학 위에 가상을 덮어씌우는 증강현실 게임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포켓몬고]의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의 위치와 크기는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박윤진의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는 게임 대기업 넥슨이 세 번째로 출시한, 한국 게임의 ‘고전’ 중 하나인 [일랜시아](2018)를 다룬다. [일랜시아]는 [바람의 나라](1996)나 [메이플스토리](2003) 등 넥슨의 다른 흥행작과 같은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장르의 게임이다. [포켓몬고]가 게임의 세계를 실제 세계 위에 고스란히 중첩시키는 증강현실이라면, [일랜시아]는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때문에 게임 안에서 유저들은 많은 자유도를 부여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의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일랜시아]는 버려진다. 2008년을 마지막으로 신규 콘텐츠 업데이트가 멈추었고, 단순 패치마저 2014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쉽게 말해 넥슨은 [일랜시아]를 버렸고, 게임에 남은 것은 매크로와 버그, 그리고 극소수의 유저뿐이다. 박윤진 감독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게임에 남은 극소수의 유저 중 한 사람이다. 16년 동안 [일랜시아]를 플레이한 그는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하는 것일까?”라며 모두에게 질문을 던졌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유저들의 답을 담는다. 


 여러 인터뷰에서 박윤진 감독은 게임 속 캐릭터의 이름인 ‘내언니전지현’이 자신의 ‘본캐’이고, ‘나(박윤진)’이 ‘부캐’라고 말했다. 그와 그의 길드원들은 관성적으로 게임에 접속한다. 매크로를 돌리기 때문에 굳이 무언가를 ‘플레이’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게임에 접속해 있다. 이들의 인터뷰는 게임 밖에서도 진행되지만, 게임 내 채팅을 통해 진행되기도 한다. 심지어 넥슨의 다른 게임 [아스가르드](2003)의 유저를 인터뷰하기 위해 해당 게임에 접속하는 장면 또한 등장한다. [일랜시아]는 [마인크래프트]나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오아시스’처럼 무한한 확정성을 지닌 게임이 아니다. 업데이트를 멈춘 [일랜시아]는 12년 전의 모습 그대로 고정된 세계다. ‘내언니전지현’을 비롯한 길드원들은 ‘일랜시아’ 안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할 수 없다. 매크로가 난립하며 플레이어들은 정해진 루트에 따라 캐릭터를 육성하고, 일랜시아 세계관을 따르는 대신 자신의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혹은 게임 내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시간을 투자한다. 박윤진 감독은 [일랜시아]의 상황을 [일랜시아] 밖의 현실과 엮는다. 입시, 졸업, 취업 등의 정해진 루트가 있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러한 루트를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 [일랜시아]라는 멈춘 세계는 일종의 도피처임과 동시에 현실의 대응물이다. 지구에 떨어진 카오스를 피해 떠난 고대인들이 영력을 하나로 모아 일랜시아를 만들었다는 게임의 설정은, IMF 외환위기와 연관된 뉴스 화면을 보여주며 시작되는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대응물이다.


 ‘내언니전지현’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부차적인 존재로 두는 박윤진 감독의 인터뷰는 단순히 두 존재 사이의 역전된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 존재를 잇는 ‘과’라는 접속사는 어느 한쪽의 세계에서 다른 한쪽의 세계로 흘러나오는, 혹은 침범하는 상황들을 지시한다. ‘나’는 ‘내언니전지현’으로 접속하는 존재이며 ‘내언니전지현’은 ‘나’의 접속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시험준비를 위해 잠시 게임을 떠난 길드원 ‘로렐’이 로그아웃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접속을 끊는다는 것은 [일랜시아]의 세계에서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박윤진 감독이 인터뷰한 길드원과 유저 중에는 시험이나 노동 등의 이유로 잠시 게임을 떠났던 이들이 많다. ‘나’가 존재하는 실제 세계의 상황은 ‘내언니전지현’의 존재를 위협한다. 어떤 악성 유저는 자신의 캐릭터가 만난 다른 캐릭터들의 접속을 끊어버리는 ‘팅버그’를 통해 유저들의 게임을 종료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게임의 상황은 ‘나’가 [일랜시아]로부터 튕겨져 나오도록 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공존은 끊겨버린다. 이 상황을 해결한 운영진은 게임을 떠난 지 오래다. ‘나’는 행동에 나선다. 넥슨 본사를 찾아가고 넥슨의 노동조합인 ‘스타팅포인트’를 만나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나’의 시도는 성공하고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공존은 다시 시작된다. 두 세계는 서로의 상황을 주고받는다. 


 게임의 가상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접속이라는 절차, 현실과 다른 시야, 실제 사물과 다른 질감의 사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 배경음악과 효과음을 비롯한 장치들, 현실의 물리학과 지리학을 따르지 않는 가상세계의 규칙들. 그리고 이 요소들은 게임의 세계를 실제 세계와 다른 것으로 분리한다. 박윤진 감독을 비롯한 유저들이 [일랜시아]를 그리워하고, 그것에 향수를 갖는 것은 그것의 가상성 때문이다. 이들은 이 게임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다른 게임에 정착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한 유저의 말처럼 [일랜시아]의 도트 그래픽이 아름답기 때문일수도 있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일 수도 있다. 더 본질적으로는 [일랜시아]가 12년 간 변화하지 않는 세계, 그렇기에 유저들이 매크로 등의 방식을 동원하여 새로운 규칙을 세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많은 SNS 유저가 지금은 서비스를 중단한 싸이월드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일랜시아]는 새로운 집단적 향수의 공간이다. 해외로 파병된 미군 병사의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가상의 미국이 된 용산 미군기지처럼, [일랜시아]의 멈춰버린 세계는 유저들의 향수병을 달래 줄 가상의 세계를 구성한다. 영화는 [일랜시아] 안에서 ‘내언니전지현’의 길드 단체사진과 현실의 길드원들이 함께 한 MT 기념사진을 중첩시킨다. 이는 가상 세계 속의 운동을 실제 세계에서 구현하려는 욕망이자 놀이이다. 이들이 MT를 떠난 펜션 직원이 과거의 [일랜시아]를 즐겼던 사실을 이야기하자 길드원들은 맞장구를 치며 열광한다. 가상 세계에 대한, 그리고 그 세계로 하여금 충족되는 향수는 그 세계를 넘어 실제 세계에 당도한다. 게임 내 문제 해결을 위해 박윤진 감독이 넥슨 본사를 찾아간 것처럼, ‘나’와 인터뷰이의 인터뷰가 ‘내언니전지현’과 게임 내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진행되는 것처럼, 두 세계는 양쪽으로 흐르며 중첩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중첩되는 두 세계 사이의 접속사 ‘과’ 탐구하는 픽션이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영화가 상영된 이후, [일랜시아]에 12년 만에 신규 이벤트가 개최되고 서버점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박윤진 감독이 게임의 가상세계를 초과해 영화를 제작한 것처럼,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영화가 담아낸 세계를 초과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라이아이>와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게임의 허구적 세계, 가상 세계를 실제 세계의 열화된 버전이나 단순한 도피처로 다루지 않는다. 두 영화가 다루는 게임의 세계는 녹화되고 다른 영상들과 결합되어 영화의 허구적 세계를 구성한다. 게임을 녹화한 이미지는 실제 세계를 촬영한 이미지와 같은 지위를 갖는다. 이는 당연하게도 영화의 이미지가 필름 스트랩 대신 편집 프로그램의 타임라인 위에 올려지는 디지털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에 대해 홍성윤의 <그녀를 지우는 시간>(2020)은 흥미로운 사례다. 이 영화는 게임을 다룬 영화는 아니지만, 은 역시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컴퓨터 스크린 필름 혹은 데스크탑 필름이라 불리는 장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언프랜디드>(2014)나 <서치>(2018) 등 주로 호러나 스릴러 장르에서 사용되던 데스크탑 필름 장르는 대부분 스마트폰이나 랩탑의 화상통화를 소재로 삼는 반면, <그녀를 지우는 시간>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영화를 편집하는 화면이다. 


화사한 화면의 로맨스 영화처럼 시작한 영화는 갑작스러운 귀신의 등장과 함께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유튜브와 유사한 형태의 자막과 함께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영화감독과 편집자다. 감독이 열심히 촬영한 영화의 OK컷마다 귀신이 나타난다며, 죽은 영화도 살린다는 편집자에게 편집으로 이 영화를 구해달라고 찾아온 상황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두 사람의 대화를 들려준다. 영화를 보여주던 화면이 실은 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 프로의 화면이었음이 드러난다. 영화는 디지털 영화를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를 통해 편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편집자가 로맨스 영화를 별로 안 보신 것 같다며 어떻게든 컷을 살리고자 억지 부리는 감독과,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귀신의 존재를 지워보려는 편집자의 대립이다. 귀신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단순히 배우의 뒤편이나 후경 어딘가에 서 있기도 하고, 오열하는 배우의 눈물을 피눈물로 바꿔 놓거나 한 주인공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너희는 죽은 목숨이다”라는 음성으로 변조하기도 한다. 귀신은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경험인 영화 곳곳에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편집자와 감독은 데스크탑의 모니터 스크린을 노려보며 귀신을 지워내는 게임을 벌여야 한다. 


 사실 디지털 영화에서 귀신을 지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예산이 허락한다면 CG로 귀신을 덮어버려도 되고, <그녀를 지우는 시간>의 편집자처럼 귀신이 나온 부분을 크롭하거나 인서트 컷으로 대체해버려도 된다. 귀신의 음성이 들어간 부분에선 후시녹음을 진행하거나 아예 사운드트랙틀 제거하는 방법도 있다. 감독은 몇 번의 클릭만으로 가능한 간단한 방식들이 자신이 영화를 촬영한 ‘의미’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거부한다. 이 과정은 영화 만들기가 촬영의 영역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편집을 비롯한 지난한 후반작업을 동반함을 보여줄 뿐 아니라, 자신이 촬영한 이미지와 대결을 벌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능력한 감독에게 분노한 스탭과 배우들의 저주일 수도, 혹은 감독의 무능력함에 분노한 이미지 자체일 수도 있다. 감독이 촬영한 이미지와 귀신이 끼어든 이미지는 프리미어 프로의 타임라인 위에서 동일한 지위에 놓인다. “감독님 영화 죽었어요! X발 죽어서 뒤졌다구요!”라고 말하는 편집자의 관점에서 두 이미지는 모두 제거 또한 변형의 대상이다. 편집자가 상대하는 대상은 무능력한 감독이 가져온 허구와 거기에 끼어든 귀신이라는 허구이며, 두 종류의 허구는 편집자의 데스크탑에서 얼마든지 삭제, 교체, 변형 가능한 디지털 이미지가 된다. 영화의 후반부, 귀신이 등장하는 컷을 지우길 거부하는 감독이 편집자와 말다툼을 하는 와중에 귀신이 스크린을 넘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감독이 가까스로 삭제 버튼을 누르자 프리미어 프로가 재부팅되며 귀신은 사라진다. 자신이 촬영한 이미지에 과몰입한 감독은 자신이 촬영한 이미지가 허구를 구성한다는 것을 잊은 채 자신만 이해하는 의미에 집착한다. 귀신의 출몰은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에 자신의 현실을 끼워 맞추려는 감독의 집착에 대한 이미지의 저항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지우는 시간>의 영문제목 <Digital Video Editing with Adobe Premiere Pro: The Real-World Guide to Set Up and Workflow>는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 ‘파이널 컷 익스프레스’ 교재의 제목에서 ‘Final Cut Express’를 ‘Adobe Premiere Pro’로 바꿔 패러디한 것이다. 해당 교재의 책소개는 실제 세계(Real-World)에서 파이널 컷 익스프레스를 사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쓰여 있다. 실제 세계라는 단어에 담긴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녀를 지우는 시간>은 디지털 영상이 편집되는 공간을 실제 세계로 두고 그곳에서 영화를 편집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편집할 때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촬영이 실제 세계를 카메라의 프레임에서 분리해 허구적 세계를 구성할 이미지를 채집하는 과정이라면, 편집은 그러한 이미지들로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실제 세계에서 채집된 이미지 조각들은, 그것이 채집된 순간 그것이 속해 있던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변질된다. <그라이아이>에서 그것은 실제 세계를 뒤덮은 가상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내언니전지현과 나>은 [일랜시아]의 가상 세계와 ‘나’의 실제 세계 사이의 중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영화는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실제 세계뿐 아니라 가상이라 여겨지는 게임의 세계에서도 채집한다. 그 이미지들은 <그녀를 지우는 시간> 속 편집 프로그램의 타임라인 위에 올려져 새로운 허구, 픽션을 구성한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가상을 목격하는 그라이아이의 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에 선을 긋는 대신 두 세계에 공존하는 나와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자신이 구성한 허구가 허구임을 깨닫지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 편의 영화는 더 이상 카메라가 촬영한 것의 실존이 보장되지 못하는, 그리고 영화와 게임 등 다양한 매체가 자신만의 다양한 가상 세계를 만들어내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를 다룬다. 이들의 작업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진실 같은 것에 괘념치 않고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성을 탐구하는 실천이며, 서로의 세계를 초과하는 가상과 실제, 그리고 둘 모두를 관객의 눈앞에 가져오는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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