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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15. 2020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20

 태풍이 몰아치던 날 세진(노정의)이라는 소녀가 실종된다. 경찰은 증인보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외딴섬에 머무르고 있던 그가 유서를 남겼다는 점을 들어 사건을 자살로 결론 내리려 한다. 출동 중 교통사고와 이혼 소송 등의 문제로 인해 휴직 중이던 경찰 현수(김혜수)는 복직을 위한 준비로 이 사건의 최종 보고서를 맡는다. 사건 조사를 위해 세진이 머무르던 섬에 내려간 현수는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이정은)을 통해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현수는 세진의 마지막 행적들이 자신의 삶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한 소녀의 죽음에 얽힌 음모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는 경찰이라는 추리 장르의 익숙한 전개를 따라가는 듯하다. 세진은 아빠가 저지른 범죄의 거의 유일한 증인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현수가 세진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은 마치 세진이 엮인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 파고드는 것처럼 전개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장르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수가 세진의 행적을 쫓으며 순천댁 등의 인물들을 만나고 탐문수사를 벌이는 과정은 영화 밖의 매체를 포괄하는 추리 장르의 익숙한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건의 전말이나 범죄의 방식이 아니다. 영화는 그것 대신 현수가 CCTV 영상에 담긴 세진의 얼굴 위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모습을 담는다. 즉 현수가 쫓는 것은 세진임과 동시에 세진 위에 덧씌운 자신이다. 물론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다. 이혼 소송 중인 현수는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자신을 바람피운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벌어진 교통사고로 한쪽 팔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기도 했다. 직장과 직장이 아닌 곳, 동료와 동료가 아닌 이들 모두가 현수를 어떤 식으로든 재단한다. 그것은 조언과 비난 둘 모두에 해당한다. 세진도 마찬가지다. 아빠의 범죄 사실이 담긴 장부를 경찰에게 직접 전달했음에도 누군가는 그와 거리를 두고, 누군가는 과도하게 가까이 접근한다. 현수가 CCTV 영상 속 세진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투영한 것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둘이 공유하는 고통의 종류가 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현수는 그 누구도 쉬이 눈치채지 못한 세진의 아픔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순천댁은 둘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다. 남동생이 죽고 혼수상태의 조카를 돌보고 있는 그 또한 어떤 아픔을 간직한 존재다. 그가 농약을 마시고 식도가 타버려 말을 못 하게 된 사람이라는 설정은 그 고통을 이정은이라는 배우의 연기로 육화하려는 설정이다. 순천댁은 세진의 아픔을 이해한다. 수사를 위해 섬을 찾은 현수를 경계하지만 이내 현수가 어떤 것을 하려는 지 알아차린다. 순천댁과 세진의 연대, 현수가 느끼는 세진과의 동질감은 언어로 닿을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의 교환으로 표현된다. 세 배우의 호연은 <내가 죽던 날>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세 사람의 고통과 연대를 통한 극복이라는 주제를 훌륭하게 전달한다.

 아쉬운 것은 영화의 만듦새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느린 영화는 아니지만, 현수가 탐문수사에 나서며 세진뿐 아니라 현수의 과거까지 등장하는 구조를 취하기에 캐릭터의 감정선은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 하지만 편집은 종종 감정에 앞서는 듯 조급하다. 몇몇 대화 장면에서 사방으로 움직이는 카메라와 그것을 열심히 따라잡는 컷들은 그저 산만하기만 하다. 또한 캐릭터의 감정을 설명하는 내레이션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것을 도리어 망쳐버린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의 다른 한국영화들처럼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촬영된 영상에 강황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누런 톤으로 색보정을 하는 것 또한 영화 전체의 톤을 영화의 마지막에서 망쳐버린다. 배우들의 호연과 감정에 초점을 맞춘 추리극이라는 서사는 좋았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연출과 여러 기술적인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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