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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06. 2020

2020-12-05

1. [헉슬리]라는 게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시 [뮤 온라인] 등으로 유명했던 웹젠이 200억원을 들여 제작한 이 게임은 MMO-FPS라는 하이브리드 장르를 표방한 게임이다. 디스토피아 이후 사피엔스와 얼터너티브 두 종족으로 갈라진 인류가 세력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대규모 전투와 MMORPG적인 요소들이 잔뜩 가미된, EA의 [헬게이트 런던]을 연상시키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온라인게임 치고 꽤나 고사양이었기에 동시접속자가 많지 않았고, 티져 영상을 비롯한 개발사 측의 예고와는 달리 인게임 컨텐츠가 상당히 부실했다. 2008년 한게임(이것도 추억의 이름) 서비스를 시작한 [헉슬리]는 2010년 서비스 종료되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1년 가량 [헉슬리]에 빠져 살았다. 2008년 테스트 운영할 때부터 2010년 상반기 한게임을 통해 오픈되엇다가 그해 말 서비스 종료까지 꽤나 열심히 게임을 했다. 당시 기숙사에 살았기에, 주말마다 PC방에 나가 거의 10시간 씩 이 게임만 하다 돌아오곤 했다. 물론 '망겜'이기에 PC방에 갈 때마다 게임을 새로 설치해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했지만. 어쨌든 [헉슬리]는 사라졌다. 비슷한 느낌으로 역시 한게임이 서비스했던 [울프팀]도 즐겁게 했었다. 늑대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독특한 컨셉의 FPS라는 점에서,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이나 당시엔 넥슨에서 서비스했던 [워록] 등을 열심히 해왔던 터라 자연스레 그 게임에 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게임도 망했다. 찾아보니 2015년 한국서버는 서비스 종료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워록]도 흔히 말하는 '망겜'이 되어버렸고,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은 좀비모드가 도입된 이후 고인물들의 공간이 되어버렸으며, [서든 어택]은... 뭐라 더 붙일 말도 없다. 그러고보니 [메이플스토리]와 [카트라이더] 정도를 제외하면 남들 다 하던 [스타크래프트], [피파 온라인], [던전 앤 파이터],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등은 별로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 PC방을 가면 나 혼자 [워록]이나 [귀혼]을 하고 있었으니까. [메이플스토리]마저 빅뱅패치 이후에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대학교에 들어간 뒤 다시 시도해보긴 했었다. 너무 달라진 게임에 적응하지 못해 금새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사실 [헉슬리]나 [울프팀]처럼 서비스를 종료해버린 게임이 아닌 경우라면 언제든지 당시에 했던 게임들을 플레이할 수 있다. 다만 그 게임들이 이미 내가 좋아했던 그 게임이 아닐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메이플스토리]는 오르비스와 루디브리엄이 처음 추가되었을 때의 두근거림이고, 그곳을 탐험하는 데 도움이 될 가이드북을 구입해 뒤적여보는 것이었다. 지금의 [메이플스토리]는 한 권의 가이드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카트라이더]도 비슷하다. 라이센스를 따기 위해 가이드북에 부록으로 딸려 온 DVD 속 공략 영상을 돌려보며 수십번 시도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이 시스템은 사라졌다. 


2.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곱씹을수록 [일랜시아]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게임이라는 생각만 든다. 운영진이 떠난 자리에서 유저들은 스스로 게임을 업데이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배포하고(여기엔 물론 매크로가 포함되어 있다), 게임을 유지한다. 그렇게 유지된 게임은 20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왔다. 시간을 버텨온 것은 그 안에 남은 유저들도 마찬가지다. [헉슬리]나 [울프팀]처럼 서비스가 종료되지도, [메이플스토리]처럼 게임이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지도 않은 [일랜시아]는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유저들은 (박윤진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트북을 열면 자동으로 PC카톡이 켜지는 것처럼 [일랜시아]에 접속한다. 하물며 [콜 오브 듀티] 시리즈처럼 콘솔을 통해 배급되는 게임마저 출시직후 업데이트를 하는 마당에, 몇 년 동안 그 흔한 서버점검조차 하지 않은 [일랜시아]는 넥슨의 게임이라기 보단 그곳에 남아있는 유저들의 게임이라는 인상이 더욱 강하다. '자생성의 게임'이라 부르는 게 적절한 게임이 아닐까? 공식 가이드북에서조차 매크로를 권하고 그것 없이는 플레이가 불가능한 게임, 유저가 직접 버그를 고치고 매크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유하는 게임, 더 이상 할만한 인게임 컨텐츠가 없어도 그곳에 남아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는 유저들의 게임. 이 지점에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일랜시아]를 해본 적 없는 관객도 지금은 사라진 '망겜' 내지는 자신의 추억과 달라진 지금의 게임을 떠올리는 관객들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함과 동시에, 그 게임들과는 다른 [일랜시아]와 유저들의 면모를 드러내며 예상치 못했던 길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3. 내가 쓰는 글들은 대체로 어떤 충동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요즘 영화비평쓰기 수업을 들으며 깨닫고 있다. 합평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이다 보니 하나의 영화 혹은 감독을 정해두고 글을 써야하는데, 정말 할 말이 없어서 아무말을  쓰다가 모니터만 바라보며 멍 때리는 상황의 반복이 이어지고 있다. 다음 주가 마지막 수업인데, 지난 주에 쓴 그레타 거윅 감독론의 결론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글을 30분 동안 노려보면서도 단 한 문장도 떠오르지 않아 플스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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