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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4. 2017

거대한 문어처럼 능글맞고 미끈거리는 ‘배운 변태’ 박찬

2016 박찬욱 작품 <아가씨>

*스포일러 있음

박찬욱이 돌아왔다. <암살>로 돌아온 최동훈과 <대호>를 만든 박훈정, 각각 <밀정>, <군함도>, <덕혜옹주>로 돌아올 김지운, 류승완, 허진호 등 최근 들어 영화 잘 만든다는 감독들의 시선이 모두 일제강점기에 몰려있는 가운데, 박찬욱의 새 영화 역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고른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를 한국을 배경으로 풀어내려다 보니 가장 적절한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였다고 한다. 

영화는 숙희(김태리)가 타마코라는 이름으로 히데코(김민희)의 집에 하녀로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엔 단지 일자리를 구하러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숙희에겐 다른 속내가 있다. 백작이라고 불리는 장물아비(하정우)의 계획에 따라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다. 변태적인 히데코의 이모부(조진웅)의 눈을 피해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하도록 유도하고, 결혼한 뒤 히데코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후 재산을 상속받는 다는 것이 그 계획. 숙희와 백작은 히데코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개봉 전 영화의 잔인함 수위에 대한 루머가 SNS에 떠돌았다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 크라이스트>에 버금가는 수위가 들어있다는 내용이었다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 영화의 소재 등을 보고 나니 루머가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허나 직접 확인한 영화의 잔인함 수위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높지 않았다아마 박찬욱 영화에서 가장 낮은 수위의 잔인함이지 않을까야함의 수위도 그 동안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는 수준은 아니다

<아가씨>는 영화가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를 원작으로 한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첫 스틸컷이 공개되었을 때첫 예고편이 공개되었을 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다위와 같은 루머도 그 동안 박찬욱이 보여준 컬트적인 느낌장르적인 느낌에 따른 예상이 와전된 것이었을 것이다허나 결과물은 예상 밖이다칸 영화제에서도 역대 박찬욱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이다는 평을 받았고박찬욱 특유의 찝찝한 엔딩 대신 명쾌한 엔딩이 있다는 리뷰가 이어졌다리뷰들을 보며 살짝 당황했다내가 아는 <올드보이>의 그 감독이 맞는 건가?

직접 본 <아가씨>는 케이퍼 무비와 블랙 코미디를 재료로 만든 여성영화였다변태적이고 탐욕적인 남성들에게서 해방되는 여성들의 이야기, <아가씨>는 주제의식 면에서도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와도 닮았다영화의 두 남성 캐릭터인 백작과 이모부는 여성을 철저히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한다두 캐릭터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과 야설을 읽어주고 춘화를 재현해줄 도구로 히데코를 정의한다그리곤 그 정의대로 백작 자신의 마음에 느는 순간만 히데코를 좋아한다 말하고이모부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도구로 만들기 위해 비인간적 훈육을 가한다그들이 임모탄 조와 다를 것이 뭐가 있나.

허나 백작과 같은 목적을 가지도 히데코에게 접근한 숙희는 히데코를 진심으로 동정한다히데코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는 사람은 영화 안에서 숙희뿐이다아마 숙희가 히데코의 튀어나온 이빨을 갈아주던 순간부터였을 것이다숙희 역시 히데코의 돈을 노리고 접근했지만결과적으로는 백작에게서도 이모부에게서도 숙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특히 히데코가 어릴 적부터 그녀를 괴롭혀온 야설들과 춘화들을 숙희가 찢어발기고 물속에 처박아 빨래하듯 짓밟는 장면은 여성에 의한 여성 해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나의 타마코나의 숙희.”라는 <아가씨>의 주제를 압축한다

<아가씨>는 정교한 세트와 일제강점기의 실제 귀족들이 입었을 법한 의상들까지 칸에서 류성희 미술감독이 벌칸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미술을 보여준다그리고 이런 장치들은 <올드보이>때부터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에 담기면서 굉장한 미장센을 스크린에 선보인다얕은 심도의 렌즈를 사용해 촬영한 화면들은카메라의 초점이 집중한 곳만 선명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어 영화 내내 인물들의 시점에서 영화를 본다는 느낌을 준다유독 숙희와 히데코의 시점샷이 많이 나오는데영화의 전체적인 촬영이 이를 이어받는다가령히데코가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히데코의 시점샷으로 잠시 등장하는데히데코의 시선에 따라 카메라의 초점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누군가는 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화려한 카메라 기교는 영화의 미장센을 완성하고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아가씨>는 분명 기존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과는 다르다배우 하정우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다가(예를 들면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등과 유사한 유머유머를 구사하는가 하면,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처럼 장르 팬들을 들끓게 하는 장면은 없다헐리우드에 가기 전에 대중성에 대한 감을 잡으려는 것일까어찌되었든 <아가씨>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여성중심의 한국상업영화이다김태리라는 신인의 화려한 등장이자김민희라는 배우의 끝없는 성장세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거대한 문어처럼 능글맞고 미끈거리는 배운 변태’ 박찬욱의 영화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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