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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03. 2021

2021-04-03

1. 친구가 전시를 연다. 합정지구에서 4월 9일부터 한 달간 진행되는 <정여름 개인전: HAPPY TIME IS GOOD>이다. 작년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개인적으로는 비평상 당선작의 주제를 잡을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작품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작업들과 함께 상영되며, 신작 <긴 복도(The Long Hole)>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코로나19로 인해 전시는 사전예약제로 진행되며, 예약은 아래 링크에서 가능하다. 


2. 어제 영상자료원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전쟁의 사상자들>(1989)를 봤다. 이제 막 베트남에 온지 3주 가량 된 신병 에릭슨이 소속 분대의 병사들이 저지른 민간인 납치, 강간, 살해를 목격하고 그것을 고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반의 전투 장면이나 일인칭 시점 숏으로 진행되는 두 차례의 롱테이크, 사건을 목격하는 에릭슨의 시점 숏 등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특유의 기교들이 드러나며,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삼은 당대의 영화들처럼 큰 스케일과 가감없이 묘사되는 (미국시점에서의) 전쟁의 참상 등이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시점에서의'이다. 영화는 귀국한 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에릭슨이 우연히 베트남계 여학생을 보게 되고, 그로부터 자신이 베트남에서 목격한 것들에 대한 악몽을 꾼다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즉 에릭슨은 지극히 안전한 곳에서 베트남전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으며, 영화 내내 그가 베트남에서 겪은 온갖 참상들이 드러남에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는 지하철의 좌석이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 숏은 에릭슨이 지하철에서 마주친 베트남계 여학생이 건네는 "악몽을 꾸셨나봐요. 이제 다 끝났어요."라는 대사다. 때문에 영화는 액자 구성이라는 구조적 프레임을 통해, 에릭슨을 당사자의 위치에서, 내부고발자의 위치에서 관괜의 위치와 유사한 위치로 옮겨버린다. 영화의 서사 내에서 이는 당시의 참상을 고발한 내부고발자이며 살해위협에 시달리는 에릭슨이 보호받고 있음을, 보호받아야 함을 알리는 장치이지만, 이는 동시에 목격자이면서 방관자에 다름아닌 이들에게 그들 또한 안전하다고 베트남계 사람의 입으로 말하는 파렴치함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3. 씨네21의 창간 26주년 연속기획 "시네마는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실린 유운성 평론가의 글지 좋았다.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들을 발췌해본다. 


에이젠시테인은 영화가 존재하기 이전 시기의 여러 다른 예술적 산물들에서 몽타주의 원리를 발견하고 있다. 엘 그레코의 회화에서부터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몽타주를 그 원리로 삼아 끊임없이 변증법적 운동을 계속하는 시네마, 혹은 시네마라고 불리는 것, 과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에이젠시테인의 반본질주의적 영화론을 참조해 말하자면, 이것은 잘못된 물음이다. 시네마라는 것은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지 않는 변증법적 사물이기 때문에 그것의 정체를 묻는다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우리는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영화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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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라 불리는 대상은 그 자체로는 장치가 아니지만, 장치들(키네토스코프, 시네마토그래프,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 가상현실 등)을 통해서만, 그리고 장치들 사이에서만 활성화되고 거꾸로 그러한 장치들을 활성화하기도 하는 변증법적 사물이라는 것은 앞서 밝힌 대로다. 텍스트를 비롯해 소리와 음성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시각 매체라 불리는 이 장치들은 그러한 명명에 걸맞게 이미지를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미지는 어쩌면 <현기증>의 저 꽃다발과 같은 것은 아닐까? 이미지는 그 자체가 시네마라는 대상의 필수적 성분이기라고 한 것처럼 우리를 홀려왔고 또 홀리고 있는 맥거핀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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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장치들이 서로간에 유지하는 거리/사이/차이가 필수적인데, 디지털 기술을 대표하는 컴퓨터의 토대가 되는 알고리듬은 이러한 거리/사이/차이를 폐지하면서 모든 장치를 통합하는 추상적인 형식이다. 결국 시네마라는 유령은 다시 퇴치되고 동일성의 형식으로서의 알고리듬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시네마는 장치들 사이에서 변증법적으로 활성화되는 대상이 아니라 여러 장치들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단순한 이름으로 축소된다. (...) 하지만 이렇게 굴복해버려도 좋은 것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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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영화란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은 리얼리즘이라는 태도를 요구하는 규제적 이념으로만 남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영화와 완전영화의 이념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간극이 있게 된다. 이러한 간극이야말로 바쟁이 보는 영화미학의 자리다. 영화에 있어서 미학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완전영화라는 신화/가설/픽션을 전제하는 한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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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상당수의 시네필들은 역량주의적 논법에 기대면서도 정작 자신이 가설로 삼고 있는 역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예 고려하지 않거나 심지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 "영화는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주장은 종종 이런 무책임을 위장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나는 이를 역량 없는 역량주의의 시네필리아라고 부르고 싶다. 이처럼 기만적인 시네필리아는 지질학자라기보다는 풍수지리를 보는 지관(地官)의 태도와 비슷한 것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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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 없는 역량주의의 시네필리아는 역량주의의 탈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종교화된 유령주의라고 해도 무방하다. 역량 없는 역량주의의 시네필리아도 잠직 역량 비슷한 것을 가정하기는 한다. 가장 떠올리기 쉬운 일상적인 예는 어떤 영화 작품, 어떤 시퀀스나 장면, 어떤 숏을 보고 (이따금 과시적으로 무릎을 치기도 하면서) "이건 정말 영화적(cinematic)이야!"라고 외치는 식의 행태다. 이 발인이 의미를 지니려면 '영화적'이라고 부른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질문은 필여적으로 가설을 요구하는 것인데 가설을 제시하는 대신 질문을 우회해버리는 것이 역량 없는 역량주의의 시네필리아다. (...) 시네마라는 역량을 현실의 영화작품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작가적 역량'이라는 것으로 슬며시 대체해버리는 종교화된 유령주의다. (...) 현실의 영화들을 움직이는 불가시적 역량에 대한 가정이 없으면, 역량주의의 시네필리아는 숨은그림찾기나 퀴즈풀이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역량주의란 구조와 힘 모두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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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학술적 매체연구의 조건이라 할 유령주의는 변증법적이지 않다. 일종의 메타적 매체로서의 범용 기계가 여타의 매체들을 통합하는 일방적 과정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범용 기계의 범용성(universality)은 모든 사물들을 상품화하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보편성(universality)에 상응한다. 따라서 그것은 추상적 일반화에 입각한 거짓 보편성일 뿐이다. 본디 역량주의에 근거를 둔 시네필리아가 오늘날 종교화된 유령주의가 되었다면, 유령주의에 근거를 둔 매체연구는 오늘날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프로그램의 역량주의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추상은 유령이 아닌 만큼이나 역량 또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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