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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30. 2021

2021-04-30

1. 전주국제영화제에 왔다. 개막이 어제였어서, 온라인상영을 통해 두 편의 영화를 미리 관람했다. 그리고 오늘 전주에 와서 두 편을 관람했다. 아래는 관람작들에 대한 단평

<물속의 속삭임> 오온유 2020

 영화는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아 흐릿한, 하지만 여성의 사진임을 알 수 있는 어느 영정사진으로 시작된다. 어떤 여성의 목소리는 "죽은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의 제목인 <물속의 속삭임>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물속'은 진공상태이기에 인간의 말이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에서 속삭임이란 성립될 수 없는 소통수단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혹은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물속의 속삭임처럼 어떤 진동을 지닌 채 존재하지만 들리지는 않는, 진공상태의 언어와 같다. 영화는 그러한 언어를, 영매라는 수단을 통해 드러내보인다. 전달되지 않는 언어를 전달하기, <물속의 속삭임>은 이를 연대의 전제로 삼고 실천에 옮긴다.

<이리로 와> 아노차 수위차꼰퐁 2021

 태국의 정치/사회사를 다뤄온 아노차 수위차꼰퐁 감독의 신작 <이리로 와>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버마로 군수품을 운송하기 위해 건설한 깐짜나부리 지방의 '죽음의 철도'를 다룬다. 당시 철도 건설을 위해 6만 명에 가까운 포로와 강제노동자가 동원되었으며, 건설 과정에서 대부분 사망하여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화는 깐짜나부리 지방에 위치한 '죽음의 철도 박물관'을 찾아가는 네 명의, 20대 남녀와 숲을 헤메는 한 여성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깐짜나부리를 찾는 네 명의 모습, 방콕에서 연극을 준비하는 네 명의 모습, 숲을 헤메는 여성의 모습, 그리고 달리는 열차에서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을 촬영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구성하는 네 개의 레이어는 어떤 논리적 연관에 의해 등장한다기 보단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퍼즐 조각과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다만 관객은 그것을 맞출 수 없다. 어떤 순간은 깐짜나부리에서, 방콕의 연극에서 반복되기도 하고, 인물들의 연극 연기 연습은 동물의 소리를 내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들의 '죽음의 철도'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이 영화는 사각형이 되었던 원형이 되었던 어떤 깔끔한 틀을 지닌 퍼즐이라기보단, 어딘가 조각들이 맞춰지긴 하지만 그것이 명확한 모습의 틀 속에 들어맞지는 않는, 어딘가 찜찜하게 튀어나온 구석이 잔뜩 있는 퍼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구성의 난삽함이 영화의 단점은 아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엉클 분미>에서 신화적이고 마법적인 순간을 통해 태국의 현대사를 환기하였다면, 아노차 수위차꼰퐁의 <이리로 와>는 어딘가 맞지 않는 퍼즐의 불명료함을 통해 그것을 환기하려는 것만 같다. 

<Trans-Continental-Railway> 정재훈 2021

 <환호성>, <호수길>,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 등 실험적인 영화를 연출해온 정재훈 감독의 신작이다. 밴드 유기농맥주가 작년 발표한 동명 앨범의 뮤직비디오를 표방하는 이 작품은 '극장에서의 상영만을 목표로 제작'되었다. 영화제 홈페이지에 공개된 시놉시스엔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1897년 최초로 운행했다. 영화가 아직 기계 장치라면 여전히 관객의 몸은 영화를 통해 멀리까지 갈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영화관의 공간을 보고 운송수단 차량의 내부구조를 상기시킨다며, “오늘날에 영화가 상영 장소 없이 존재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장소들이 과연 영화 없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폴 비릴리오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비릴리오는 시각기계인 카메라와 운송수단을 동일시하는데, 정재훈 감독의 이번 영화는 그러한 동일시에 바탕을 둔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관객을 운송하는 공간이 대륙횡단열차가 지나치는 그곳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물가, 황무지, 풀숲 등이 한국인지 시베리아인지는 (영화만 보고 나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관객의 시선은 영화의 카메라라 머무른 시간 만큼 그 장소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큼은 명확한 사실이다. 재밌는 것은 영화의 제목과 다르게 구체적인 열차의 이미지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장에서의 상영'만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만이 영화관=운동수단의 등식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장소에 대해, 그것이 카메라에 담겨 있기에 그곳이 실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과, 열차가 그러하듯 영화를 통해 그 장소에 대한 공간적 경험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정도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영화는 구체성이 사라진 이미지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음악의 역동과 관계없이 풍경을 보여줄 뿐인 것과 같았던 영화는, 어느새 달리는 열차에서 바깥을 촬영한 듯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어떤 형상들을 보여주다가, 화소가 다 드러날 정도로 확대된 디지털 스크린의 평면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정재훈 감독의 영화관=운송수단은 열차가 갈 수 있는 풍경-장소들을 지나 영화가 갈 수 있는 스크린-풍경으로 향한다. 이 순간에서 드러나는,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이기에 디지털 스크린에서는 상영되지 않는다는 역설은 '영화의 죽음'이라는 케케묵은 담론 속에서 모종의 생존전략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다가온다. 정재훈의 전작들은 소멸해가는, 혹은 소멸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저화질 디지털 이미지를 통해 복원하려 하였다. 전작의 대상들이 노동, 자연, 풍경 등의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의 대상은 영화관을 염두에 둔 것만 같다.

<파편> 나탈리아 가라샬데 2020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나탈리아 가라샬데와 그의 가족이 8mm 캠코더로 촬영한 홈비디오 푸티지들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1995년 아르헨티나 리오테르세르 군수품 공장이 폭발하여 도시가 초토화되고, 7명의 사망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당시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품이다. 재난과 국가폭력이 겹치는 영역에 놓인 사건을 사적인 기록과 기억을 통해 접근한다는 점에서 김응수가 만든 두 편의 세월호 영화나 주현숙의 <당신의 사월>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홈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지난달 콜리그를 통해 공개된 나의 글 [기억의 조건(들)](https://colleague.co.kr/forum/view/483428)에서 이야기한 국내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홈비디오 푸티지를 활용한 방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파편>은 이러한 내용적 형식과 매체적 형식의 화학작용이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난 사례다. 감독과 그의 가족이 겪은 사적인 기록들은 재난의 상황과 국가폭력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소위 '사적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영화들이 액티비즘이나 더 큰 사회를 논의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라는 단어가 그 작품들의 함의를 폄훼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는 의심이다. 다시금 <파편>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영화는 홈비디오의 재편집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매체를 주요한 방법론으로 채택하였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액티비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김응수의 <오, 사랑>이 사건 자체와 관련 없어 보이는 이의 내레이션과 동선을 통해 사건 자체에 다가가는 역동을 담아낸다면, <파편>은 처음부터 사건의 중심부에 위치한 인물이 기록해낸 것이 근본적으로 지닌 역동 자체에 대한 것이다. 특히 사건 당시를 직접 촬영한 장면에선 동일본 대지진이나 작년 베이루트에서 있었던 폭발사고 당시 개인들이 SNS에 공유한 영상들을 연상시킨다. 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기록, 증거,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영상들은, 사적인 매체와 채널을 통해 생성된 것이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그것을 초과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파편>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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