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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03. 2021

2020-05-02

1. 전주영화제 3일차. 4편의 장편을 봤다.

<모든 곳에, 가득한 빛> 테오 앤서니 2021

 이 영화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한다. 미국 경찰이 사용하는 테이저건과 바디캠을 제작하는 액손의 CEO가 회사의 기술을 소개하고, 19세기 금성일식 관측의 역사와 마레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며, 무인항공기를 통한 실시간 감시체계 도입을 놓고 벌어지는 흑인 공동체의 토론 또한 등장한다. 이것들은 카메라의 존재 자체로 인해 발생한 기술적, 심리적, 도덕적 감시체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감독은 자신의 안구 뒤에 숨겨진 시신경을 보여주려 한다. 시신경은 각막이 수용한 시각적 정보를 뇌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만 시각적 정보 자체를 수용할 수는 없는 사각지대에 다름없다. 테오 앤서니의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모든 곳에 카메라가 있는, 모든 곳에 있는 카메라에 모든 것이 촬영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카메라라는 눈 뒤에 위치한 사각지대에 있는 것은 무엇(혹은 누구)인가? 영화는 카메라가 제공하는 객관성의 환상을 벗겨내고 카메라-눈이 만들어낸 판옵티콘을 가능한 직시하려 한다. 그리고 카메라의 사각지대인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의 방향으로 카메라를 겨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자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 가능성에 대한 신뢰, 감시체계의 존재 자체로 분열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반대의 방향으로 카메라를 겨눌 수 있는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제안한다. 

<저항의 풍경> 마르타 포피보다 2021

 영화는 2차대전 당시 나치즘과 파시즘에 맞서 활약했던 여성 파르티잔인 소냐의 기억을 따라간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고, 유고슬라비아 최초의 여성 파르티잔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좌파 운동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마르타 포피보다는 자신이 진행하는 좌파 운동의 대선배격인 소냐를 찾아가 그의 기억을 구술사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당시 저항운동이 벌어졌던 공간들의 풍경을 보여준다. 느릿한 디졸브로 겹쳐지는 풍경들, 97세가 된 소냐의 목소리, 감독인 마르타의 일기와 기록, 아카이브된 자료들이 영화를 구성한다. 소냐의 기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아내려는 후배 운동가의 노력과,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선배 운동가의 나이 든 모습이 이 영화 자체의 존재 의의가 된다. 파르티잔의 군가와 함께 영화가 미처 담지 못한 소냐와 파르티잔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자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느린 화면을 쫓아가는 것이 쉽진 않지만, 장면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긴 기억과 그것에 대한 존경심은 충분히 느껴진다.

<자비로운 밤> 미카 카우리스마키 2020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형 미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다. 형제가 헬싱키에서 운영하는 술집에서 촬영된 영화로, 2020년 4월 팬데믹으로 인해 락다운된 상황을 담아낸다. 공교롭게도 형제가 운영하는 술집의 이름은 '코로나 바'이다. 영화는 바를 운영하는 헤이키,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의사 리스코, 얼떨결에 사람을 해친 사회복지사 유하니가 밤새 와인을 마시며 삶, 관계, 정체성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단순한 플롯으로 전개된다. 팬데믹으로 인해 바의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피어난 세 갱년기 중년 남성의 이야기는, 물론 '남성성의 위기'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팬데믹 초기에 있었던 묘한 낙관이 묻어난다. 이는 감독의 동생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매번 감지되던,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일말의 낙관성을 찾아내던 것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팬데믹으로 인해 술집에 모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낯선 타인을 만나는 것조차 어딘가 불안한 상황에 대해, 그래도 우리는 만나서 대화할 것이라 선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아직 마스크도 제대로 쓰지 않던 시기에 급박하게 촬영되었기 때문인지 다소 중구난방인 숏들이 눈에 띈다는 점이 아쉽다. 

<그녀의 사회주의 미소> 존 잔비토 2020

 존 잔비토의 이름은 여러 번 들었지만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다. 국내에는 유년시절을 다룬 위인전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는 헬렌 켈러의 전기영화와 같은 형식을 띠는 작품으로,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자신의 목소리로 강연을 한 뒤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그의 삶을 다룬다. 다소 당황스러웠던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텍스트의 양이다. 육성과 영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인물이기에, 영화는 연설문, 편지, 인터뷰, 저서에 담겨 있는 그의 말들을 직접 삽입한다. 영화는 크게 그러한 텍스트들, 눈이나 꽃, 말 등의 자연물을 촬영한 푸티지, 아직 남아 있는 그의 영상 아카이브, 영화의 내레이션을 녹음하는 장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이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헬렌 켈러의 삶을 잘 소개하고 흥미로운 비평을 시도하는 데 유용했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가령 스탈린 집권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헬렌 켈러의 입장에 덧붙어 80년대에 있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상적 흐름에 대한 노엄 촘스키의 강연을 덧붙이는 것은 헬렌 켈러를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비평하는 몽타주다. 하지만 그 밖의 장면들에선 헬렌 켈러의 삶에 대한 통찰보단 이러한 구성에 대한 의문점이 더 많이 남았다. 다만 열정적인 사회운동가로 연대를 실천하고 시대의 지성인으로 활약했던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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