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08. 2021

<블랙 위도우> 케이트 쇼트랜드 2021

*스포일러 포함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시점 직후,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는 소코비아 협정을 위반한 자신을 붙잡으려는 로스 장군(윌리엄 하트)을 피해 도주한다. 로스 장군과 쉴드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은신하던 그에게 과거 가짜 가족을 구성해 작전을 수행했던 옐레나(플로렌스 퓨)에게서 의문의 약품이 도착한다. 그것을 노리고 정체불명의 적 태스크마스터(올가 쿠렐린코)가 나타샤를 공격해온다.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옐레나를 만난 나타샤, 그는 구소련의 잔재와도 같은 드레이코프 장군(레이 윈스턴)이 여전히 레드룸을 운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나타샤는 옐레나와 함께 레드룸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과거의 가짜 가족인 알렉세이(데이빗 하버)와 멜리나(레이첼 바이스)를 찾아간다. 팬데믹으로 인해 1년 이상 개봉이 연기된 MCU의 24번째 영화 <블랙 위도우>는 <아이언맨2>로 처음 등장한 나타샤 로마노프/블랙위도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영화다. <시빌 워>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악몽 장면이나 <어벤져스>,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 등에서 대사로만 언급되던 나타샤의 과거를 다루고 있다. 

 <블랙 위도우>는 냉전시기 첩보물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는 쉴드와 하이드라 사이 첩보전처럼 그려졌던 <윈터솔져>의 방법과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윈터솔져>는 하이드라라는 나치 잔존세력을 적으로 그렸다면, <블랙 위도우>는 구 소련의 잔존세력인 드레이코프 장군과 그의 레드룸이 적으로 등장한다. 그 때문인지 영화의 첫 장면은 나타샤, 옐레나, 멜리나, 알렉세이가 가짜 가족으로 위장해 오하이오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다. 이는 알렉세이와 멜리나가 쉴드에서 정보와 기술을 빼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장면의 시간적 배경이 1995년이라는 것이다. 1995년은 소련이 붕괴되며 냉전이 끝나고 3년가량 지난 시점이다. 물론 냉전 이후에도 소련과 미국 양측의 첩보망이 남아있기야 했겠지만, 별다른 설명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관객에게 납득을 바라며 대뜸 냉전시기 첩보물을 들이대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다가온다. 

 어쨌든 <블랙 위도우>의 중심은 냉전시기의 잔재와도 같은 나타샤의 가짜 가족이다. 혈연관계가 아닌 가족이지만, 어쨌든 가족의 형태로 3년의 시간을 보낸 이들은 각각 딸, 엄마,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는 그 과정에서 쌓인 감정, 살인병기로 키워진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려 한다. 오하이오에서 복귀한 가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는 어린 나타샤와 옐레나를 레드룸에 데려가 새로운 ‘위도우’로 육성하려 하고, 알렉세이를 수용소에 집어넣는다. 그 사이 멜리나는 훔쳐온 정보를 통해 이들을 세뇌할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한다. 멜리나가 개발한 약물은 옐레나를 비롯한 나타샤 다음 세대의 위도우들을 화학적으로 세뇌하는 데 사용된다. 나타샤가 정신적으로 세뇌된 것보다 더욱 강력한 방식으로 세뇌되는 것이다.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과 영화의 주연이자 제작자로도 참여한 스칼렛 요한슨은 <블랙 위도우>가 가스라이팅에 대한 은유라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세뇌라는 설정, 그것을 극복하는 비-혈연적 자매애, 하비 와인스타인을 비롯해 미투 운동 시기 폭로된 여러 성 포식자(sexual predator)들을 떠올리게 하는 드레이코프의 외모와 행동 등은 그것을 투박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준다. <블랙 위도우>가 <아이언맨2>나 <어벤져스> 직후에, 혹은 미투운동 이전에 제작되었다면 지금의 모습과는 다소 달랐을 것이다. (사실 그 때문에 지금의 모습과 같은 영화는 <인피니티 워> 이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색함이 남음에도 <007 문레이커>의 장면을 집어넣으면서까지 냉전과 같은 구시대의 산물을 끌어오는 것도, 미투운동 이전의 시기를 구시대로 호명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윈터솔져>가 나치에서 파생된 하이드라가 실은 쉴드 자체였다는 설정을 통해 감시사회나 군사자본주의 등을 언급했다면, <블랙 위도우>는 냉전과 첩보물이라는 옛 장르를 통해 미투 이후의 시대를 언급한다. 나타샤의 액션 중 적지 않은 분량이 적을 살리려는 행동이었음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더욱 확실해진다. 

 다만 MCU라는 거대 세계관 안에서 <블랙 위도우>의 위치는 꽤나 아쉽다. 단순히 다른 작품에 비해 스케일이 작고 액션이 적은 것에 문제는 아니다. 초능력이나 거대한 무기가 없는 나타샤(와 옐레나)의 액션은 영화의 주요 레퍼런스였을 본 시리즈 등의 첩보 액션영화 스타일을 적절히 사용했다. 부다페스트에서 나타샤와 옐레나가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집기를 사용해 격투를 벌이는 모습은 꽤나 박력있다. 태스크마스터와 나타샤/옐레나가 벌이는 카체이싱은 어딘가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의 런던 카체이싱과 탱크 장면을 섞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분노의 질주>가 초능력 없는 인간들이 벌이는 액션의 스케일을 점점 키우기 위해 벌였던 것을, <블랙 위도우>에서 속성으로 끌어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밖에도 부족한 스케일을 부풀리기 위해 눈사태를 일으킨다던가 레드룸의 정체가 하늘에 숨겨진 거대 요새였으며 그것을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소코비아마냥 추락시킨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나름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블랙팬서나 호크아이의 모션을 재현하고, 알렉세이와의 격투에서 <윈터솔져> 속 캡틴 아메리카와 원터솔져의 액션 안무를 고스란히 따온 태스크마스터의 액션 또한 캐릭터의 설정에 알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아쉬운 부분은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인피니티 워>와 곧바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금발로 염색한 나타샤는 퀸제트를 구해 다른 어벤져스를 구하러 떠난다. 이륙하는 퀸제트와 함께 앨런 실베스트리가 작곡한 어벤져스 테마가 등장한다. MCU의 영화들을 충실하게 따라온 관객이라면, <엔드게임>에서 나타샤의 죽음이 호크아이의 짧은 대사로만 다시 언급되었을 뿐임을 기억할 것이다. 토니 스타크의 성대한 장례식과 반대로 제대로 된 추도사조차 등장하지 못했던 나타샤의 미래를 아는 관객들에게 어벤져스의 테마를 들려주며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쿠키영상에서야 그의 소박한 묘지를 보여주는 것은, MCU의 영화를 개별적인 작품으로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지금 시점에서 블랙 위도우의 팬들을 기만하는 것에 가깝다. 옐레나가 나타샤의 뒤를 잇는다 해도, 나타샤 로마노프의 퇴장이 다른 ‘원년멤버’들에 비해 적당히 처리되었다는 인상은 여전하다. 게다가 옐레나가 등장할 다음 작품은 <블랙 위도우> 타이틀의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호크아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인 더 하이츠> 존 추 202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