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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3. 2021

실패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랑종> 반종 피산다나쿤 2021

*스포일러 포함


 태국의 랑종(무당)을 취재하려는 다큐멘터리 팀은 북동부에 위치한 이산지역에서 비얀 신을 모시는 님(싸와니 우툼마)을 만나게 된다. 대를 이어 비얀 신을 모셔온 가문의 후손인 님은, 실은 먼저 신병에 걸렸던 언니 노이(씨라니 얀키띠칸)가 신내림을 거부하자 대신 무당이 된 것이다. 노이의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을 치르던 날, 다큐멘터리 팀의 카메라에 노이의 딸인 밍(나릴야 쿤몽콘켓)의 이상한 행동들이 포착된다. 하지만 밍에게 들어온 것은 비얀 신이 아닌 정체불명의 무언가였다. 님은 오빠인 마닛(야사카 차이쏜)과 노이에게 밍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다. <곡성>의 나홍진이 제작과 원안을 맡은 것으로 화제가 된 <랑종>은 <셔터>로 한국에서 유명한 반종 피산다나쿤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유사성을 보이는 무당 문화를 바탕에 두었다.

 <랑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파운드 푸티지 형식(페이크 다큐멘터리와 파운드 푸티지는 엄밀히 말해 다르지만, 많은 경우 혼용되고 있기에 본 리뷰에서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통일하여 쓰기로 한다.)의 호러 영화 중 퇴마/엑소시즘을 다룬 영화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장르의 시초 격인 <블레어 위치>부터 <라스트 엑소시즘>,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 <곤지암> 등 많은 작품이 마녀, 악귀, 엑소시즘 의식 등을 소재로 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을 만들어왔다. 언급한 영화들 외에도 호러 영화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한 사례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타이카 와이티티의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 안드레 외브레달의 <트롤 사냥꾼>, 맷 리브스의 <클로버필드> 등의 영화들을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다. 그중 <랑종>을 본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파코 플라자와 하우메 발라게로의 <R.E.C>다. 직업인들을 인터뷰하는 TV 다큐멘터리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소방관과 함께 어느 건물에 들어갔다 좀비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는 이야기의 작품이다.

 <랑종>을 보고 <R.E.C>를 떠올린 이유는 단순하다. 영화의 후반부는 <R.E.C>를 거의 고스란히 가져왔다. 님의 동료 랑종이 밍 속의 악령을 쫓아내려는 의식에 실패하자, 그의 제자들은 갑자기 좀비처럼 다큐멘터리 팀을 공격해 물어뜯기 시작한다. 카메라에 부착된 플래시나 야간 촬영 모드의 녹색 화면 등이 활용되고, 급박한 상황을 연출하는 핸드헬드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그대로 옮겨내려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완전한 실패다. <R.E.C>의 카메라가 TV 리포터를 따라다니며 본래의 상황 설정을 유지하는 것과는 다르게, <랑종>의 카메라와 그 뒤의 촬영팀은 멋대로 영화 속에 개입했다가 물러난다. 가령 신병의 증상으로 생리혈을 흘리며 화장실로 달려간 밍을 뒤쫓아간 카메라가 밍의 모습을 관음하는 장면은 그 장면에 앞서 등장한 ‘다큐멘터리’라는 설정 하에 촬영된 장면들과 결을 달리한다. 이 장면에서 화장실 문 틈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는 밍을 담아낸 장면은 마치 귀신이 등장하는 점프 스케어처럼 촬영되었다. 이 장면 외에도 카메라는 영화가 스스로 설정한 다큐멘터리라는 범위를 초과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물론 <랑종>이 실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고,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취하는 규칙(가령 윤리적 접근 등)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의 구도로 님과 노이, 밍 등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인터뷰하던 카메라와 인물을 설명하는 자막 등 방송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고스란히 차용한 만큼, 일정 부분 그것의 형식을 따라야 한다. <랑종>은 밍의 등장과 함께 스스로 세운 형식을 무시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밍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카메라는 어서 그가 신병에 걸리길 바라는 것처럼 그를 관찰한다.

 <R.E.C>를 거의 그대로 따라한 영화의 후반부가 엉망진창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곡성>과 <부산행> 등에서 좀비들의 움직임을 디자인한 박재인 안무가를 통해 만들어진 귀신 들린 좀비들의 움직임을 보고 겁에 질린 다큐멘터리팀의 카메라는 다큐멘터리 현장을 급습한 공포감 따위의 것이 아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이 영화는 밍을 매개로 한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다큐멘터리인 척하는 것을 너무나도 일찍, 빠르게 포기해버린다. <클로버필드>에서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내려놓고 친구에게 달려가는 장면이나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에서 제작진과 뱀파이어들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려보자.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안에서 조성된, 보통의 극영화와 다르게 제한된 촬영범위, 제작진과 촬영 대상 사이의 관계, 다큐멘터리 혹은 파운드 푸티지라는 전제가 제공하는 논픽션의 감각과 현장감 등이 <랑종>에는 없다. 노이의 남편 가문이 공장을 운영하며 저지른 원죄라던가, 한국의 근현대사와 닮아 있는 태국의 군부독재,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의 모종의 대립 등을 굳이 끌어오며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스스로 설정한 컨셉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에 실패한 영화 앞에서 고루한 외침일 뿐이다. 영화는 <엑소시스트>나 <캐리> 등 오컬트의 고전으로 불리는 영화 속 여성-괴물을 현재의 태국에 구현하고, 평범한 시골 처녀가 창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앞세우다 스스로 세운 덫에 걸린다. 차라리 점프스케어로 점철된 감독의 전작 <셔터>나 타이 호러의 클리셰들을 유희의 소재로 사용한 <피막>이 <랑종>보다 재밌고,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랑종>의 카메라는 공포를 향해 다가가지 않는다. 공포를 피해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저 젊은 여성을 매개로 한 공포가 등장하기를 지루하게 기다릴 뿐이다. 그 기다림 끝에 마주한 것은 공포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몰라 폭력만을 욱여넣은, 이미 앞선 페이크 다큐멘터리 작품들이 시도했던 것의 반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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