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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21. 2021

전쟁이 가져온 정체성들의 경합

<피닉스> 크리스티안 펫졸트 2014

 2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아우슈비츠 생존자 넬리(니나 호스) 친구 레네(니나 쿤젠도르프) 도움을 받아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총상으로 인해 얼굴이 훼손된 넬리는 성형수술을 받지만 본래의 얼굴로 온전히 되돌아오진 못한다. 넬리는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필드) 찾으려 하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러던 , 미국인 구역의 클럽 피닉스에서 일하는 조니를 발견하지만, 그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조니는 넬리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하지만 끌려간 직후 자신이 이혼을 신청해 이제는 남남인 아내의 유산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연기해달라는 것이다. 넬리는 자신이 넬리라는 것을 감춘  조니가 제안한 기묘한 연극에 동참하게 된다. <바바라>, <트랜짓> 함께 졸트의 ‘전쟁 삼부작으로 불리는 <피닉스> 2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담아낸다. 가족과 친구들은 각자의 생사를 온전히 알지 못하고, 도시엔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들의 잔해가 즐비하다. 치안은 승전국인 미국 군대의 손에 달려 있으며, 유대인인 레네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떠나 유대인 거주 구역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다.

 <피닉스>는 영화가 담아내는 시공간의 내적인 혼란에 비해 차분한 리듬으로 전개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넬리의 느릿한 발걸음과 목소리는 전쟁으로 무너지는 베를린에서 생존해온 조니나 레네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넬리는 비록 예전과 같지 않은 몸짓과 얼굴이지만 여전히 넬리 자신이다. 조니는 넬리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그를 자신이 기억하는 아내의 모습처럼 바꾸려 한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 필체, 걸음걸이 등, 마치 영화나 연극 감독이 배우에게 연기 디렉팅을 하는 것처럼 모든 방면에서 그의 말을 따를 것을 넬리에게 요청한다. 이전과는 다른 얼굴로 베를린에 돌아온 넬리는 그 과정을 조니와의 새로운 연애처럼 느낀다. 레네는 넬리가 수용소에 끌려간 직후 조니가 이혼을 신청했으며, 넬리가 체포된 이유 또한 조니의 밀고 때문일 것이라 주장한다. 레네에게 조니는 넬리와 다른 유대인들을 배신한 배신자다. 하지만 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니가 제안한 연극을 이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바뀐 얼굴로 자기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넬리의 역설적인 상황은 전쟁 이후가 지닌 역설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넬리는 서로 사랑했던 남편을 위해 스스로를 연기해야 하며, 동시에 스스로는 미약하게 느끼고 있는 유대인 정체성에 대해 레네와 짧은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바뀐 그의 얼굴은, 영화 마지막에 등장한 친구들의 반응처럼 충분히 넬리임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넬리의 본래 모습 그 자체는 되지 못하는, 자신과 타자 사이의 기묘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의 얼굴은 조니와 레네라는 두 인물이 그를 끌어당기는 장력에 의해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갖게 된다. 아니, 그의 얼굴은 전쟁으로 인해 스스로를 타자화하게 된 모습이며, 그 모습이 조니와 레네라는 서로 다른 타자에 의해 각기 다른 자신으로 승인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된다. 이 기묘한 타자의 삼각관계는 전쟁이 넬리와 같은 개인에게 가져온 복잡한 정체성들의 경합을 그대로 보여준다.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명시적인 꿈의 상태와 명백히 구별되는, 몽상, 백일몽, 낯섦, 마법과 같은 상태를 통해 존재하는 상태에서 시지각적, 음향적 이미지는 세계의 운동으로 연장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꿈의 세계가 외면화되어 나타나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상정하는 운동이 아닌 세계 전체가 운동하는 것과 같은 세계-이미지라 말한다. 얼굴을 잃어버린 넬리는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토대를 상실한 , 전쟁 이후라는 새로운 토대, 새로운 얼굴에서 움직인다. 성형수술을 담당한 의사는  수술을 재건 혹은 복원 수술이라 말한다. 하지만 넬리의 얼굴은 절대 이전과 같을  없다. 자신의 신체에서 자신이 탈각된 상황은  자체로 꿈의 상태와 유사한 성질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넬리에게, 조니는 전쟁 이전의 자신이 지녔던 제스처, , 화장법을 요구하고, 레네는 종종 전쟁 이후의 변화를 어떤 전복 내지는 전진의 기회처럼 여기며 동참을 촉구한다. 넬리는 양자 사이에 놓인  그들의 제안들이 만들어내는 리듬 위에서 움직인다.  리듬에서 벗어나는 넬리의 마지막 장면은 양자의 장력에 얽매이지 않는 자아의 발견이자  자체로 세계에서의 탈주이며, 다른 곳으로의 진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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