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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27. 2021

공정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워스> 사라 코랑겔로 2020

 오랜 시간 대형 로펌을 운영해온 켄(마이클 키튼)은 그동안 고엽제, 석면 등의 재해 사건을 맡아 왔다. 어느 날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에 테러가 발생하고 미국 전체가 혼란과 공포에 빠진다. 연방의회는 미국의 물류와 교통을 담당하는 항공사를 구제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의회와 법무부 등은 테러 피해자들에게 피해보상금을 주어 이들이 항공사에 대해 집단소송을 하는 것을 방지하려 한다. 이들은 켄에게 보상금 지급을 결정하는 위원회의 위원장 자리를 요청하고, 켄은 자신만만하게 수락한다. 하지만 대기업 CEO부터 건물 수위까지 다양한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건에서, 공정하고 적절한 보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산출방식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연봉 등을 고려해 결정된 보상금 산출공식은 유가족들의 반발을 사고, 유가족 중 한 명인 찰스 울프(스탠리 투치)는 불공정한 보상금 산출공식을 고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리틀 엑시던트>, <나의 작은 시인에게> 등을 연출한 사라 코랑겔로의 신작 <워스>의 원제는 “What is Life Worth”다. 번역하자면 “목숨 값은 얼마 정도일까?”가 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 유가족이 죽은 사람의 목숨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냐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켄은 한 로스쿨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칠판에 “What is Life Worth”라 적은 뒤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만약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의 보상금이 적절할까? 자리에 앉은 다양한 학생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는다. 켄은 이들의 대답엔 목숨 값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빠져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금액을 정하는 것이 법조인의 일이라 말한다. 두 장면으로 구성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켄이 마주하게 될 딜레마를 미리 알려준다. 하지만 영화는 이 딜레마를 다루기 위해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켄은 자본가의 편에 가까운 대형 로펌의 수장이지만, 영화는 그를 악인이나 선인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영화는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해 격렬한 감정이 오가는 대화 장면이나 장황한 대사를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켄이 보상금 위원회 일을 진행하며 겪는 딜레마는 화면 속 인물의 위치를 통해 드러난다. 영화 초반부에는 켄의 뒷모습을 화면 정중앙에 위치시키는 숏이 세 차례 등장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서 고가의 오디오 장비로 오페라를 듣는 모습, 집 근처 해안가에서 잠시 바다를 보는 장면, 법무부 장관과의 면담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장면. 세 번의 뒷모습 이후 법무부 장관을 만난 켄은 자신이 이번 사건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한다. 게다가 이번 일을 무료로 맡겠다는 말까지 건넨다. 그의 뒷모습을 담는 쇼트는 영화 속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보상금 문제를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켄의 태도를 그대로 담아낸다. 반면 본격적으로 위원회 일이 시작된 이후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쇼트의 구석에 놓인다. 영화는 2.35:1의 넓은 화면비를 택했음에도 테러의 스펙터클함을 재현하지 않는다. 사건 당시의 기록영상을 제외하면, 영화 속 테러의 재현은 창 밖으로 보이는 연기뿐이다. 대신 영화의 화면비는 등장인물들의 화면 속 배치에 동원된다. 테러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금방이라도 프레임 밖으로 밀려날 것 같은 화면 끝자락에 위치하지만, 켄은 러닝타임 대부분에서 화면 중앙에 위치한다. 화면을 삼등분했을 때 중앙은 켄의 자리며 유가족이나 테러의 트라우마를 겪는 로펌 직원 프리야(수노리 랴마나단) 등의 위치는 화면의 가장 가장자리다.

 켄의 보상금 산출공식은 유가족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으며, 유가족과의 개별 면담이 진행될수록 산출공식으로 잡아낼 수 없는 피해자들의 삶이 켄 앞에 등장한다. 동성결혼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동성애인은 유가족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까? 죽은 소방관이 내연관계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보상금 논의를 그의 아내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기존 산출공식이 연봉만을 반영한다며 업무상 인센티브 등을 보상금 산출에 추가할 것을 요구하는 자본가의 유가족과, 20만 달러의 최저 보상금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는 사망한 이민자의 가족들 사이의 차이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개별 면담 장면은 로펌 직원과 유가족 사이의 숏-리버스 숏의 익숙한 구성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로펌 직원들은 종종 유가족이 앉아 있던 텅 빈자리를 바라본다. 빈자리를 향한 리액션은 다른 대사나 묘사 없이도 이들이 겪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켄이 화면 중앙을 벗어나는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서 등장한다. 그는 테러 피해자를 위한 기부 행사에서 찰스를 만난다. 켄은 자신의 산출공식이 포괄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에 대해 자신이 실패한 것 같다 말하고, 찰스는 그러한 일괄적인 산출공식은 공정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대화 도중 이들의 화면 속 위치는 조금씩 변화한다. 화면의 중앙과 가장자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계속 뒤바뀐다. 이 장면 이후에서야 켄은 화면 중앙을 벗어나 프레임의 여러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 이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신화 속에서 공정한 산출공식을 만들고자 했던 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공정은 모든 이들을 하나의 공식에 끼워 맞추어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대화 전까지 켄은 산출공식과 함께 규정을 말해왔다. 하지만 그에겐 규정 안에서 예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량권이 있다. 물론 켄은 규정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뜯어고칠 수 없으며, 보상금 전체를 늘려 모든 이에게 충분한 보상금이 돌아가도록 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이 보상금은 항공사에 대한 집단소송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회의 긴급구제로 인해 시작된 것이다. 때문에 켄이 맡은 보상금 위원회의 일은 처음부터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기업을 구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산출공식에 재량권을 더해 수많은 예외적 사례들을 포괄하려는 극 후반부 켄의 행동은, 극 초반 의회가 항공사를 구제하기 위해 발 빠르게 예외조항을 만들어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9.11 테러는 지난 20년 간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낸 예외적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한 역사적 예외의 피해자들을 하나의 공식에 맞춰 처리하려는 태도는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공정은 어떤 정해진 틀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하나씩 배제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켄은 자신에게 재량권이 있음을 재인식하게 되는 찰스와의 대화 이후 프레임 중앙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프레임 한쪽 끝에 내몰려 있던 이들 또한 프레임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정해진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인지할 때, 아니 정해진 위치라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 있을 때 공정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워스>는 그 과정에 한걸음 다가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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