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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27. 2021

아수라장 그 자체인 남자들

<잘리카투> 리호 호세 펠리세리 2019

 ‘잘리카투(ஏறுதழுவல்)’는 남인도 타밀나두주의 수확축제 기간 중 열리는 경기로, 남자들의 무리 사이에 황소를 풀어 두고 그를 제압하는 것이다. 영화 <잘리카투>는 남인도지역 말라얄람어권 작가인 S. 하리쉬라가 쓴 단편소설 [마오이스트]를 원작으로 리호 호세 펠리세리가 연출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실제 잘리카투 경기가 등장하진 않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광경은 매번 부상자는 물론 사망자가 속출하기도 하는 실제 경기를 연상시킨다. 영화는 남인도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삼는다. 도축장에서 도살 직전의 물소가 탈출하고, 마을의 남자들은 너도나도 물소를 잡으러 나선다. 하지만 물소는 잡히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사적인 갈등, 물소의 난동으로 파괴된 물건들에 대한 다툼, 단순히 재미를 위해 날뛰는 사람, 좁은 마을에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나서는 사람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뒤섞인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아침이 되어 눈을 뜨는 마을 남자들의 모습이다. 뮤지컬 영화처럼 음악에 맞춰 눈을 뜨는 남자들의 모습이 이어진 뒤, 영화는 마을과 도축장의 일상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물소는 고기가 되어 비닐봉지에 담기고, 사람들은 고기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들의 일상은 물소의 탈출 이후 뒤바뀐다. 처음엔 물소를 잡기 위한 목적은 단순히 물소가 마을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물소가 잡히지 않은 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물소를 둘러싼 ‘잘리카투’가 벌어진다. 마을 남자들은 문명을 잃어버린 것처럼, 지도자와 발할라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워보이들처럼 움직인다. 물소를 잡기 위해 횃불과 손전등을 든 남자 무리가 밤새 산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은 쉽게 보지 못할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가, 물소를 잡는다는 목적 하나로 하나의 일을 수행하지만 모든 것이 아수라장인 상황을 빠른 리듬의 편집과 다양한 소음을 활용한 음악으로 담아낸다. 종종 등장하는 롱테이크는 어디선가 물소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남인도의 정글 곳곳에서 문자 그대로 달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아수라장의 현장감을 담아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라스코 벽화 속 원시인들의 모습을 재현한다.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후반부의 장면 속 마을 남자들의 모습은 아무런 규칙도, 협의도 없는 상황의 원시인과 같다. 영화가 이를 굳이 너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만, 모든 이성을 집어 던진 채 진흙더미가 되어버린 남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지막 장면의 설명이 적절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영화는 시작에 앞서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 부분을 인용하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19장을 덧붙인다. 20장은 믿는 자들에게 천년왕국을 약속하는 것이지만, 19장은 천사의 등장과 함께 사탄과의 전쟁을 예견하고 있다. <잘리카투>는 이성, 신앙, 문명 등 모든 부분에서의 믿음을 잃어버린 남자들이 엄청난 기세로 자멸하는 이야기다. 이들에게 천년왕국은 허락되지 않는다. 무저갱에 빠지는 것은 도망친 물소가 아니라 모든 것을 믿지 않은 채 달려들어 거대한 진흙덩어리가 되어버린 남자들이다. <잘리카투>는 결국 언제든지 모든 것을 망각하고 아수라장에 자신을 내던질 남자들의 대한 조롱을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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