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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30. 2021

'대의'가 배제하는 폭력

<갈매기> 김미조 2020

 청량리의 시장 상인들은 재개발 보상금에 대해 단체행동을 진행 중이다.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오복(정애화)도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 첫째 딸 인애(고서희)의 상견례를 마치고 시장에 잠시 들른 오복은 다른 시장 상인들과 술을 마신다. 밤을 새고 돌아온 오복의 표정은 어둡다. 며칠 동안 일도 나가지 않던 오복은 자신이 그날 겪은 폭력에 대해 말하기로 결심한다. 김미조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갈매기>는 중노년 여성이 겪은 성폭력과 그것을 고발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다. 우선 오복이 놓인 상황의 복잡함은 그가 말하는 것을 수차례 주저하게 만든다. 그는 동지라고 생각하며 함께 장사하고 투쟁해온 사장 상인들의 ‘대의’를 위해 말하지 않을 것을 요구받는다. 결혼을 앞두고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인애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자신의 아내가 피해자인 것을 모르는 남편 무일(장유)은 시장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폭행은 여성이 응해야 가능한 것”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영화는 오복이 겪은 폭력 자체를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오복이 겪은 물리적, 성적 폭력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대신 사건 이후 오복의 삶이 무너지는 모습, 그럼에도 다시금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오복의 모습으로 영화가 채워진다. 대사와 행동으로 감정을 풀어내기보다 오복의 얼굴에 집중한다. 얼굴 이후에 종종 등장하는 암전은 오복의 얼굴이 품은 복잡한 상황을 더 강렬하게 다가오도록 한다.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된 집회 중 단결이라는 단어가 쓰인 붉은 머리띠를 두른 오복은 건물 계단실에서 발언하는 가해자를 내려다본다. 카메라는 바깥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오복의 얼굴을 보여준다. 오복의 얼굴, 강렬하고 차가운 눈빛과 함께, 머리띠에 쓰여진 단결이라는 문구는 그것이 배제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미지다. 

 오복은 딸들의 도움을 받아 증인으로 나서 줄 시장 상인들을 한 명씩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이들은 오복에게 미안하다고 하거나, 숨어버리거나, 도리어 화를 낸다.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말한 사람은 결국 경찰서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복을 둘러싼 폭력의 분위기는 폭력을 직접 재현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오복의 내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중후반부, 오복은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해보려는 시장상인들의 모임에서 불같이 화를 낸다. 이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사건을 덮을 것을 요구하고 오복은 이에 불복한다. 결국 몸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장면은 영화의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첫 폭력이다. 핸드헬드로 담아낸 몸싸움은 오복의 얼굴을 가만히 담아내던 앞선 카메라, 그리고 오복이 증인을 찾아다니는 그 이후의 카메라와도 차이를 보인다. 구체적인 상황을 생략한 채 오복의 얼굴만으로 많은 것을 담아내던 영화는 후반부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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