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6. 2017

고급진 그릇에 담긴 자극적인 내용물

디자이너 톰 포드의 두 번째 연출작 <녹터널 애니멀스>

*스포일러 주의


 미술관 관장인 수잔(에이미 아담스)에게 전 남편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가 쓴 소설이 배송된다. 잠을 잘 못 자는 수잔의 별명이기도 한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가 소설의 제목이다. 에드워드와 수잔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을 읽는 현재의 수잔과, 수잔과 에드워드가 만나 결혼하던 과거,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이야기가 교차편집으로 등장하며 영화가 전개된다. 3개의 타임라인이동 시에 진행되고, 제이크 질렌할이 에드워드와 소설의 주인공 토니를 모두 연기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LA, 뉴욕, 텍사스라는 세 개의 공간을 각기 세련된 비주얼로 보여주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전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복수극이다. 흔히 복수극 하면 박찬욱이나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물리적 폭력으로 복수하는 영화들을 떠올린다. 총, 칼, 방망이, 장도리를 들고 화려하게 폭력을 전시하는 복수극들이 우리가 흔히 보던 복수극의 전형이다. 그러나 <녹터널 애니멀스>의 복수는 물리적인 수단을 배제한다. 소설을 통해 에드워드 자신이 받은 고통을 수잔에게 전가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행동을 이해시켜 희망을 준 뒤 다시 무너트리는 정서적 복수의 플롯은 굉장히 신선하다. 조금은 충격적인 비주얼의 오프닝과 이어지는 세련된 화면, 신선한 플롯은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영화의 외형이 고급스러운 그릇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아쉬운 것은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다. 고급스러운 그릇에 자극적이기만 한 음식이 담긴 것 같았다. 극 중에서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복수를 결심하는 계기는 세 가지다. 에드워드는 수잔이 자신을 나약하게 본다고 생각했고, 칭찬을 듣고 싶었던 그에게 그의 소설이 별로라고 이야기했으며, 그의 동의 없이 둘 사이에 생긴 아이를 낙태했다. 이후 수잔은 에드워드와 이혼하고 허튼(아미 해머)과 재혼해 살아간다. 텍사스 사내이지만 이를 탈피하려 했던 에드워드에게 ‘나약함’이라는 것이 복수를 결심하게 될 동기인가?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판을 칭찬만을 바랬다며 밤새워 글 쓴 노력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정당한가? 처음 두 개의 동기로는 에드워드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복수극의 가장 큰 동기는 아이를 낙태한 수잔의 행동이다. 에드워드의 소설 속에서 아이는 소설 속 주인공 토니를 움직이게 만드는 큰 동기 중 하나이다.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주인공 토니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던 중, 텍사스 구석의 한 도로에서 불량배 레이(에런 테일러 존슨)의 패거리를 만나 아내와 딸이 강간당한 뒤 살해당하고, 형사 바비(마이클 섀넌)의 도움으로 레이 패거리를 찾아내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소설 속에서 살해당한 아이가 에드워드가 생각하는 낙태된 아이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소설‘녹터널 애니멀스’ 속 인물들은 에드워드와 수잔이다. 관객의 관점에 따라 어떤 인물에 에드워드를 대입하고 어떤 인물에 수잔을 대입할지는 다르겠지만, 에드워드는 소설을 통해 낙태된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수잔에게 모두 전가시키려는 태도를 취한다. 소설 속 토니는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했지만 토니라는 캐릭터는 에드워드이면서 수잔이 된다. 에드워드는 토니라는 캐릭터를 통해 수잔이 자신을 떠날 때의 무력감과 분노를 수잔에게 이해시키고, 아이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뒤집어씌운다. 소설 속에서 수잔을 가해자인 레이이자 피해자인 토니로 두면서, 소설을 읽는 수잔에게 온갖 감정을 뒤집어 씌운다. 낙태 당시에 에드워드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임신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는지는 관심이 없다는 듯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낙태에 대한 모든 책임과 죄책감을 수잔에게 넘겨버린다. 물리적 폭력을 배제한 도덕적 복수를 표방하지만, 그 내용물 자체는 상당히 추악하다. 소설 속에서 토니였던 에드워드는 어느샌가 관찰자이자 조력자인 바비의 위치로 빠진다. 남성인 에드워드는 가질 수 없는 낙태에 대한 죄책감은 이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특히 소설 속 토니가 실수로 총을 자신의 복부에 쏴 죽게 되는 과정에서 멈춰가는 심장박동을 사운드로 표현하고, 토니와 소설을 읽는 수잔을 교차편집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수잔에게 끔찍한 정서적 폭력을 가한다. 모든 것을 수잔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소설을 통한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랄까.

 직접적인 폭력이 없다고 해서 이것을 도덕적 복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성인 에드워드가 낙태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판관이 된 것처럼 수잔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영화의 태도는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만 남는다. 여운이 짙은 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을 통한 정서적 복수라는 설정과 세련된 영상은 톰 포드라는 명성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그릇이자 도구이지만, 그것에 담긴 내용물은 화학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처럼 자극적이기만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주 스토커의 감정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