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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8. 2017

평범한 사람이 범인

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

 2003년은 한국영화에게 역사적인 해이다. <올드보이>,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 등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대열의 선두에 선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다. 모든 작품들이 전복적인 상상력과 대범하고 강렬한 에너지로 스크린을 집어삼켰지만, <살인의 추억>은 거기에 한국이라는 배경을 더한다. 다른 영화들은 배경으로써 한국이 영화 전체를 쥐고 흔드는 소재가 되지 않지만, <살인의 추억>은 80년대 한국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답게 갖가지 장치들을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집어넣었다. 등화관제, 전두환 정권, 데모, 안기부, 무당, 한국사회(특히 농촌사회)에깊이 배어있는 미소지니적 태도, 폭력을 행사하고 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 등 '한국적'인 것들을 132분의 러닝타임에 다 집어넣었다. 영화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색함이 없고 오히려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녹아들어 있다.

 봉준호는 이런 요소들이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빌어먹게도 잘 맞물려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형태로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아니, 살인 자체가 위의 요소들의 산물은 아닐지라도 '연쇄'살인사건이 되도록 유도하고 방치했다는 것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영화 에필로그의"평범하게 생겼던데요."라는 대사는 완벽하게 오작동한 사회의 집약이다.

 범인이 평범하게 생겼다는 것은 악의 평범성 같은 것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다. 급속히 발전하고, 농촌과 서울의 괴리감이 커져가고, "대학생들은 엠티 가서 떼씹을 한다며?" 같은 무지함이 만연하던 때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박두만(송강호)이 평범하게 그랬듯 억지로 사건을 처리하다가 헛발질만 했다는 것은 당시에(그리고 지금까지) 만연한 "좋은 게 좋은 거지"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극장에서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니 이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대한 인공물들이 눈에 띄었다. 낮은 상가들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시멘트 공장, 공장 옆에서 산을 깎아 석회석을 캐는 장면, 엽서를 찾는 서태윤(김상경)이 망연자실하는 쓰레기장 등의 모습은 숨이 턱 막힐 듯 거대하다.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것들과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논밭의 모습이 확연히 대비된다. 봉준호가 바라본 영화 속 사건은 80년대 개발도상국의 모습, 거대한 인공물과 논밭의 괴리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 아닐까.

 영화 속에서 기차가 자주 등장한다. 영화 초반부의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은 기찻길 옆 논이었고, 영화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기찻길 터널 앞에서 진행된다. 가차는 논 사이를 뚫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들어간다. 80년대 폭력의 평범성이 만들어낸 용의자 백광호(박노식)는 기차에 치여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마지막 용의자 박헌규(박해일)는 터널 속으로 도망쳐 사라진다. 폭력의 시대가 만든 무고한 용의자들은 기차를 타고 보이지 않는 미래로 사라져 버렸다. 에필로그에서 박두만이 들여다본 하수구는 밝은 건너편이 보인다. 흉악범을 낳았던 시대는 갔다.(라고 쓰고 보니 여전히 건너편은 어두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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