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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4. 2021

끝, 그리고 다시?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안노 히데아키 2021

*스포일러 포함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Q> 이후 9년만에 공개된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TVA 및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전작 이후 이 난장판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계속 궁금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TVA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넷플릭스에 공개된 이후 처음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접했기 때문에, 작품을 쏟아낸 모든 떡밥을 알지 못한다. 이를 실시간으로 따라가지도 못했고, 뒤늦게 이런저런 떡밥들을 찾아 소화하기엔 게을렀다. 커뮤니티와 여러 위키 문서에 떠도는 여러 해석들을 뒤쫓는 것은 작품을 직접 보는 것보다 즐겁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작 <Q>는 이전 작품들이 다루지 못한 시간대를 다룬다. <서>가 <TVA>의 초중반부를 반복하고 <파>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켰다면, <Q>는 제목이 퀘스천(Question)의 Q인가 싶을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신극장판 이전에 다뤄지지 않은 14년 이후라는 시간대, 네르프의 분열과 뷜레라는 저항조직의 등장, 기존과 다른 성격의 아스카와 카츠라기,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벌어진 포스 임팩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하 <다카포>)의 내용은 쉽게 짐작가지 않았다. 

 <다카포>는 <Q>의 엔딩에서 곧바로 이어진다. 중단되긴 했지만, 포스 임팩트의 여파로 붉게 변한 파리의 풍경이 등장하고, 뷜레와 마리는 그곳을 정화한다. <Q>의 엔딩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목적지 없는 길을 떠난 신지와 아스카, 레이(의 복제)는 정화된 지역의 정착촌에 도착하고, 고등학교 동창인 토우지와 켄스케 등과 재회하게 된다. 자신이 서드 임팩트의 트리거였으며 포스 임팩트까지 발생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절망한 신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저 앉아 있다. 레이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노동하며 삶을 익히고, 아스카는 다음 움직임을 준비한다. 이들을 찾아온 카츠라키와 마리 등의 뷜레 멤버들은 이들을 데리고 네르프가 에반게리온 13호기를 기동하려는 것을 저지하려 한다. 뷜레 및 아스카와 마리의 (임시) 에반게리온 2호기와 8호기가 네르프의 복제 에반게리온들을 상대하지만 역부족이다. 모든 것은 겐도의 계획대로 흘러가 인류보완계획이 완수되려는 것만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지는 다시 에반게리온 초호기에 탑승한다. 애디셔널 임팩트를 일으켜 인류보완계획을 완수하려던 겐도와 이를 저지하는 신지는 마침내 다시 마주하게 된다. 

 <다카포>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딱히 쓸모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에반게리온의 전 시리즈를 정주행한다 해도 풀리지 않을 떡밥들이 가득하고, 수많은 용어들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겐도의 죽은 아내 다시 만나기’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반복되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군”이라는 겐도의 대사는 차라리 그의 계획이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이다. 겐도와 신지가 ‘마이너스 우주’라 불리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지역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다카포>는 논리적인 구성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부터 영화는 신지와 겐도가 소환해내는 자의적인 기억들로 채워지며, 장소 또한 시시각각 변화한다. 신지가 처음 에반게리온을 타고 출격한 제3 도쿄, 신지의 학교 교실, 카츠라기의 집, 레이의 방 등이 등장하고, 제3 도쿄는 아예 특촬물이 촬영되는 스튜디오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장소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신지는 마침내 자신의 아내를 다시 만나고 싶어했던 겐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TVA의 ‘오메데또 엔딩’과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살부서사는 <다카포>에 어떤 방식으로 다시 벌어지는가?

 안노 히데아키는 이를 다소 심심한, 하지만 강력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Q>에서 죽음을 맞이한 카오루가 실은 (정확하게 등장하는건 아니지만) 뷜레의 사령관이었으며, 수없이 많은 루프 속에서 신지를 수차례 만나며 최선의 엔딩을 맞이했다는 것이 <다카포>의 결론이다. 이는 TVA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엔딩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자, 상반된 두 엔딩 사이의 적절한 중간지대를 탐색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카포>의 엔딩은 허무에 가까운 낙관이나 너무나도 충만한 절망,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구나"라는 신지의 말은 오이디푸스의 굴레를 마침내 벗어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과 같다. 이 대사가 등장하기 전 신지는 마이너스 우주에서 아스카, 카오루, 레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레이와의 대화는 신지의 초호기와 겐도의 13호기가 결투를 벌인 특촬물 세트장과 같은 곳에서 진행된다. 대화하는 두 사람 뒤에 있는 벽에 TVA판의 영상들이 영사된다. 모든 작별인사가 끝난 후 신지는 겐도와 13호기(를 비롯한 모든 에반게리온)의 가슴팍에 창을 찔러 넣고, 모든 것이 끝난다. 장소가 바뀌어 어느 지하철역, 나이든 모습의 신지의 눈앞에 레이, 카오루, 아스카가 보이고, 신지는 마리와 함께 역 밖으로 나간다. 역 바깥을 버드아이뷰로 촬영한 이 장면은 실사에 등장인물을 그려 넣는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신지는 카오루가 진두지휘하는 타임루프 속에서 마침내 적절한 엔딩을 맞이한 것일까? 혹은 이 모든 것이 안노 히데아키 본인의 우울증과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한 메타서사로만 이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제발 작품을 그만 보고 현실로 나가라고 오타쿠들에게 호소하는 메시지일까? 뭐라고 말해도 적당히 옳은 이야기겠지만, 타임루프라는 설정을 끌어와 전작들 모두를 포괄하는 결론을 내놓은 <다카포>의 엔딩은 단순히 에반게리온을 그만 졸업하고 싶다는 안노 히데아키의 바람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에반게리온이 시리즈 전체에 걸쳐 복잡한 방식으로 풀어낸 것은 결국 타인의 존재와 소멸을 인정하자는 것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다카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여러 작품을 통해 반복해온 주제를 광활한 우회로를 거쳐 도달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흉악한 (여기엔 캐릭터 상품화와 시리즈 전체를 뒤덮고 있는 ‘서비스 컷’이 포함된다) 방식으로 달려온 마라톤의 결승선이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알려주듯, 안노 히데아키와 관객은 다시 출발점에 설 수밖에 없다. 세계를 붕괴시키는 방식의 성장은 결국 세계와 자신을 구원하지만, 그 세계는 다시 찾아올 붕괴를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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