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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14. 2021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후기

<야상곡> 지안프랑코 로시 2020

 지안프랑코 로시가 3년 간 시리아, 이라크, 쿠르디스탄, 레바논의 국경을 따라 이동하며 그곳의 사람들을 촬영한 작품이다. 영화는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열강들이 중동지역의 국경을 입맛대로 긋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만을 꺼내고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 속엔 생활을 위해 새를 사냥하는 사냥꾼, 그 사냥꾼에게 고용된 소년과 그의 가족, ISIS나 알카에다 등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는 민병대, 미군이 마련한 난민캠프의 난민들, 중동의 현재를 담은 연극을 준비하는 노인들 등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이들이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종종 극영화에 가까운 구도로) 이들의 활동들을 담아내고 있다. 물론 내레이션이나 간자막 등을 통해 설명하지 않아도, 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테러, 내전, 침략, 독재.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게 점령되기 직전 그곳을 탈출한 영화감독 사라 카리미는 "이것은 내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리전쟁입니다. 이것은 강제된 전쟁입니다."라고 말했다. <야상곡>은 대리전의 결과로 발생한 생활들을 보여준다. 다만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종종 극영화에 가까운 미장센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감옥 벽을 어루만지는 늙은 어머니를 촬영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장면의 구도는 연출된 위령제를 떠올리게 한다. 극장에서 상영될 영화를 찍는 카메라 앞에서 연극을 연습하는 노인들, 자연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하는 사냥꾼의 이동, 이 장면들은 영화제 시놉시스에 적혀있는 것처럼 "지리적 경계와 시간을 초월한 휴먼 드라마에 목소리를 입"힌다기 보단 차라리 "절망 속에서 건져낸 휴먼 드라마" 같은 카피가 어울리는 잘 윤색된 서사 이미지들로 다가온다. 때문에 <야상곡>은 전작 <화염의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오는 난민들의 모습을 '아름담게' 담아내었기에 비판과 상찬을 받았던 것과 유사한 상황에 놓인다. 그 지점에서 영화는 전작의 맹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스트라툼 2> 충펑 2021

 영화가 시작하면 수많은 파괴의 장면들이 흘러나온다. 충펑 감독이 중국의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인 유쿠(YOUKU, 优酷)에서 가져온 영상들 속엔 철거, 지진, 홍수, 산사태, 전쟁 등의 이유로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되고 있다. 그 중 한 영상은 지붕 위의 사람들이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향해 기왓장과 벽돌을 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감독은 이를 보는 것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파괴의 스펙터클은 감독의 고국인 중국에서 벌어진 것 뿐만이 아니다. 중동에서 벌어진 테러와 전쟁으로 파괴되는 건물들, 그것을 촬영한 피해자들의 빈곤한 이미지, 드론이나 헬리콥터가 동원된 항공촬영 이미지 등이 이어진다. 충펑은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계속하여 인용한다. 그는 유투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모두가 너무 많이 보는 상황이 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며, 스펙터클은 개인들을 역사 밖으로 몰아내어 역사의 난민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여기서 스펙터클은 인위적, 자연적 재난상황으로 인해 파괴된 폐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 들어설 쇼핑센터의 3D 모델링 조감도 영상은 백인/외모지상주의적 스펙터클로써 주체들을 공간 밖으로 밀어낸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은 창출되지 않는다. 스펙터클이 차지한 공간은 자연재해나 전쟁/테러 등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공간의 초기화, 지층(스트라툼)이 이동하며 공간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처럼, 역사화되지 못한 폐허는 감독이 "신체영화(카메라를 든 사람이 물리적으로 충격을 받을 때 흔들리는 모습에서 나오는 미장센이라 정의하고 있다)"라 명명한 빈곤한 이미지들과 함께 역사 밖으로 밀려난다. 파괴된 유적의 폐허와 같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마음껏 촬영과 시선의 자유를 누리는 것과 다르게, 스펙터클에 의해 밀려난 폐허들은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고 이 영화의 감독과 같은 이들에게 도굴되는 빈곤한 이미지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100년 전에 촬영된 찰리 채플린의 영화보다 선명하지 못하다. 이 이미지들의 촬영자는 지가 베르토프가 주장한 키노-아이의 초월성을 지니지 못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말대로 이 빈곤한 이미지들은 베르토프가 말한 동일시를 가능케 하지만, 그것은 베르토프가 지향한 키노-아이와 반대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빈곤한 이미지를 몰아내는 빈곤한 스펙터클, 역사적 난민들은 스펙터클 바깥의 동일시를 꾀해야 한다. 하지만 <스트라툼 2>는 그것의 곤란함을 말하고 있다. 그 곤란함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벤야민의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을 인용하는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중은 자신이 촬영될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은 모두가 촬영 대상이 되어 스크린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된 상황을, 그를 통해 느슨한 대중이 단단한 대중으로 조직되어 파시즘에 저항할 수 있게 되는 혁명적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가능한가? <스트라툼 2>는 베르토프의 키노-아이가 불가능해졌음을 이야기해왔음에도, 정확히 그것의 방식으로 역사적 난민이 처한 곤란함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그리고 영화가 끝난 이후, 영화 속에서 무너진 수많은 건물들과 다르게 이 영화가 상영된 스크린이라는 벽과 스크린 및 객석이 놓인 건물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화는 상영공간을 요구한다. 스크린의 역량은 무너지지 않는 벽을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여기서 스크린은, 영화 속 가상 스크린이 <아바타>, <어벤져스>, <트랜스포머>를 상영하며 수많은 영화의 스펙터클을 영사하는 것과는 반대로 빈곤한 스펙터클이 상영되는, 스모그가 자욱한 천안문 광장에서 푸른 하늘을 상영하는 거대한 스크린과 다르지 않다. 내레이션을 통해 언급되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세운 '신 베를린 장벽'은 이 영화를 통해 전용된 스크린 자체와 다름없다. 

<중국몽> 제시카 킹던 2021

 중국의 시장경제 규모는 모든 종류의 상품에 대해 세계 최대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중국몽>은 스마트폰 주변기기, 의류, 장난감, 자잘한 생활용품, 섹스돌 등 각종 제조업 상품부터 고소득 계층을 위한 서비스업, 워터파크나 테마파크 등 엔터테인먼스 산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들을 쫓는다. 스마트폰 사용 제한, 문신 여부에 따른 취업 제한 등을 조건으로 내거는 중국의 제조업 노동시장은 "무료 와이파이!"를 일종의 복지로 홍보하고, 경호원 취직을 위한 훈련과정은 촬영되어 틱톡에 올라가 또 다른 홍보수단이 된다. 온/오프라인 모두를 장악한 중국 시장경제의 규모는 상품의 제조과정과 서비스를 위한 훈련과정 모두를 상품화한다. 틱톡과 같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은 노동자, 소비자, 사업가의 경계를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중국몽>의 영어제목은 <ASCENSION>, 즉 '상승'이다. 인력시장에서 시작한 영화는 초고소득층의 집사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이들을 지나 [리그 오브 레전드]를 즐기는 인터넷 카페 손님들을 거쳐 워터파크의 군중으로 이어진다. <중국몽>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을 시도하는 작품이 아니다. 카메라는 이들의 주변에 멈춰서서 노동, 훈련, 유흥의 과정을 쫓는다. 그 과정 끝에 영화는 경제적 계급에 관계없이 시장자본주의를 완벽하게 체득한 중국의 초상을 스케치해낸다. 

<감춰진 손톱자국: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기록영화> 오충공 1983

 컨디션 난조로 거의 통으로 잠들었다.......

<런던 순환도로> 크리스토퍼 페티, 이안 싱클레어 2003

 런던 교회를 순환하는 고속도로 M25는 마거렛 대처가 총리이던 1975년에 완공되었다. 크리스토퍼 페티와 이안 싱클레어가 M25 도로를 탐구하며 채집한 여러 이미지들에 대해 말을 주고 받는 형식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 M25는 단순한 도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M25는 사변소설의, 음모론의, SF영화의, 경제적/정치적 토론의, 역사의, 디지털 영화의 소재임과 동시에 그 자체다. 두 감독은 M25를 따라 존재하는 여러 소설 속 장소들, 가령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 속 저택, H. G. 웰즈의 [우주전쟁]에서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한 장소, J. G. 밸러드의 작품 속 콘크리트로 세워진 각종 구조물들을 탐구한다. 동시에 도로를 따라 건설된 여러 건물, 가령 시벨사(Siebel)의 본사 건물에 대한 비평적이면서도 음모론적인 언급을 이어 나간다. 도로를 완성시킨 대처의 모습은 그가 피노체트와의 회담 장면을 통해 등장하며, 그 모습은 회담을 통해 버스 민영화의 비결을 얻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한다. 이 말들은 M25 도로를 촬영한 수천시간 분량의 이미지에서 추출된 것이다. 이는 필름으로는 작업할 수 없는 것이다. 내레이션이 말하는 것처럼 필름 한 캔은 10분의 분량을 담지만 카세트 테이프는 60분을 담아낸다. M25는 필름에 기록될 수 없으며 과속 여부를 기록하는 CCTV처럼 그곳을 감시하는 시선으로만, 즉 디지털의 방법을 통해 기록되는 방식으로만 기록될 수 있다. 그것은 끝없이 순환하는 이 도로의 속성이다. 두 작가는 이 도로에 대한 이야기가 소멸할 때까지 그것을 쫓는다. 순환도로에서 시작과 끝 지점이 없는 것처럼, 두 사람은 도로를 둘러싼 모든 재료들을 편집 프로그램 타임라인 위에 올려두고 고심한다. M25는 영화화 될 수 있는가? <런던 순환도로>는 그것의 시도를 통해 생산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결국 넋을 잃고 말았음을 보여주는 고백하는 기묘한 로드무비다.

<더블 레이어드 타운> 고모리 하루카, 세오 나츠미 2019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가 극심했던 일본 이와타현 리쿠젠타카타시는 쓰나미에 휩쓸려 파괴된 마을 위에 흙을 쌓아 지대를 높이는 공사가 계속 진행중이다. 영화는 이곳을 찾은 네 명의 젊은이들이 지진 당시 희생된 소방관, 가족이 실종된 사람 등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포스트-재난 시대의 민담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더블 레이어드 타운>이라는 제목은 파괴된 마을 위에 새로운 마을이 건설 중이라는, 문자 그대로 두 겹의 마을이 된 상황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지진을 직접 겪지 않았으며 마을의 과거 모습을 모르는 젊은이이자 외지인인 네 사람의 상황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여기엔 그들이 결국 직접 말하지 못한 말들도 포함된다. "더블 레이어드 타운. 2031년 겨울"로 시작되는 네 개의 이야기는 남겨진 이들이 결국 직접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계승하고자 하는, 재난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까지 이것에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에 대한 것이다. 다만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 민담과 계승이라는 방식이 유효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바운더리> 윤가현 2021

 지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불꽃페미액션 몸의 해방>이 여성의 '몸'에 초점을 맞추어 불꽃페미액션의 활동을 담아냈다면, <바운더리>는 2015년 단체가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활동을 요약 정리해 놓은 영화다. <가현이들>을 통해 알바노조의 동료들을 담아냈던 윤가현의 카메라는, 이번엔 알바노조를 함께하던 이들과 만든 불꽃페미액션의 동료를 향한다. 다소 거칠었던 전작에 비해 안정된 만듦새를 보여주는 <바운더리>는 이들이 진행한 여러 운동을 차근차근 담아낸다. 2015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으로 시작하여 '천하제일겨털대회'와 '찌찌해방 운동' 등 여성 신체에 대해 사회적으로 규정된 제약들을 벗어던지는 퍼포먼스, 미투운동과 함께 도래한 국내 페미니즘 운동의 다양한 방향들 속에서의 고군분투 등이 영화에 담긴다. 불꽃페미액션의 활동을 계속 쫓아온 이들에겐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내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다 아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바운더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열정적이고 정신없었으며 복잡다단했던 지난 5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강은 흐르고, 굽이치고, 지우고, 되비친다> 주성저 2021

 영화는 2020년 3월과 4월의 우한 시내를 담은CCTV 화면으로 시작된다. 사람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녀야 할 시간대의 길거리는 청소노동자, 배달노동자, 경찰과 같은 공무원을 제외하면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 사운드가 삽입된 4월의 CCTV 화면에는 자동차 경적인지 사이렌 소리인지 알 수 없는 큰 소음이 들려온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멈춰 서 있고, 카메라를 든 몇몇 사람이 이들을 촬영한다. 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후의 영화는 2020년 이전의, 다시말해 팬데믹 이전 우한시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국경절을 맞이해 펼쳐지는 레이저쇼, 강 건너로 보이는 마천루 전체를 활용한 웅장한 이미지, 우한시를 가로지르는 양쯔강과 그곳에서 산책하고 수영하는 사람들, 도시가 작동하도록 공사장에서, 가게에서, 공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어진다. 홍수로 범람한 와중에도 사람들은 생활을 잃지 않겠다는 듯이 수영을 한다. 이러한 이미지들 위로 네 통의 편지가 등장한다.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다. 끊임없이 운동하는 도시의 풍경 위로 겹쳐지는, 질병 재난으로 멈춰버린 도시를 증언하고 애도하는 편지들. 전작 <프레젠트. 퍼펙트.>를 통해 자신의 노동을 끊임없이 송출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초상을 담아놓은 주성저의 신작은 그것이 중지된 지금 그 자체를 담아낸다.

<미싱타는 여자들: 전태일의 누이들> 이혁래, 김정영 2020

 70년대의 서울, 평화시장과 동화상가 등 청계천을 따라 세워진 건물들에는 수많은 피복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대부분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성 청소년들이다. 영화는 전태일의 죽음 이후 미싱 일을 시작한 이들이 어떻게 노동했으며, 전태일의 뜻을 이어받아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교실을 운영하여 공부해왔으며, 그것들을 탄압하려는 자본과 국가에 맞서 투쟁해온 과정을 담아낸다. '빨갱이', '간첩'이라는 누명에 맞서고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던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은, 전태일은 기억하더라도 그 이후의 노동운동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영화는 1977년 9월 9일 노동교실 폐쇄에 반대하는 농성 이후 체포되었던 세 명의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당시의 노동운동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세 명의 노동자, 이들과 함께 투쟁한 동지들이 당시의 모습이 담긴 자료화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 영화는 이들의 목소리로 뒤늦게 당시를 기록하는 구술사가 된다. 또한 이들의 70년대와 현재를 연결하는, 언뜻 <위로공단>과 같은 프로젝트를 연상시키는 예술적 시도는 이 영화가 구술사에 머무는 것을 넘어 공권력에 의해 공격당한 노동자들의 형상을 복원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긴 복도> 정여름 2021

 첫 장면 이후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AI탐정이 다른 AI동료와 나누는 대화다. AI탐정은 아무것도 표기되지 않은 캠프 롱의 구글맵에 단 하나 표기되어 있는 장소에 주목한다. 그곳의 이름은 ‘Camp Long ATM’이다. 이어 등장하는 것은 괌, 일본, 키르기스스탄 등에 위치한 미군기지 내의 ATM, 은행, 환전소들이다. 미군기지는 단순히 군사적 첨병이 아니다. 전작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이 미군기지가 세워진 공간이 본래 지닌 지리적 조건, 역사, 사용 방식 등을 초기화하고, 그렇게 생성된 텅 빈 영토에 가상의 미국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면, <긴 복도>는 그렇게 성립된 미군기지가 (실제로는 사라졌음에도) 가상공간에 남긴 흔적을 추적해 나가는 작업이다. 공교롭게도 캠프 롱은 작가의 조부모가 일했던 곳이다. 작품 속에는 이들이 남긴 메모, 이들이 살던 곳의 현재, 과거의 사진, 캠프 롱의 PX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 등이 등장한다. ‘이시도라’와 ‘페도라’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이들은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 미군은 기지를 세우기 위해 이들이 살던 집을 불태워버렸지만, 동시에 이들은 미군기지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의 터전을 불태워버린 것은 미국의 군사적 전략의 최전선에 놓인 캠프 롱이며, 동시에 이들에게 새로운 터전이자 ‘Happy Time’을 제공한 것은 ‘Camp Long ATM’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네트워크다. 실재가 사라진 뒤에도 남겨진 네트워크는 엉성한 글씨로 쓰인 일기 속 ‘Happy Time’을 생성한다. 군사적 침략에 뒤이은 자본주의 네트워크의 진출, 두 가지 상황은 이시도라와 페도라가 거주하던 곳의 시공간을 백지화한 다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기입한다.

<농몽> 권순현 2021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은 대학생이 되자마자 운동권에 뛰어들어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여러 투쟁 현장을 다니며 그곳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영화로 만들었다. <농몽>은 그러한 활동 이후 모든 것을 소진한 듯하 모습으로 지난 20년 간 투쟁현장에 등장한 촛불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자기연민과 자기비하로 가득하다. 이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에 대한 반성과 소회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A, B, C라 명명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다. 함께 투쟁한 사람, 처음 촛불시위를 제안한 사람,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 감독의 내레이션은 세 사람의 말과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끌어온다. 촛불시위는 평화에 상징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 당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이들은 이 시위가 무엇보다 '평화'시위일 것을 주장하며 기존의 운동권으로 불리던 이들이 전개하던 투쟁 방식에 반대한다. 그 때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제도 조선소의 투쟁을 기록하던 감독은 그곳에 위장취업할 것을 제안받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위장취업에 실패한 것에 안도한다. 얼마 뒤 조선소에서 크레인 붕괴사고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는 다시 한 번 안도한다. C는 크레인 붕괴사고를 겪었다. 그의 트라우마 앞에서 감독은 안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폭력이 전도된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평화시위를 주장하며 거리에 나서는 행위는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연대임과 동시에 시위현장에서의 폭력을 시야에서 치워버리고자 하는 모순적인 행위다. 투쟁현장을 기록하던 감독이 느끼는 자기모순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이 영화가 "일제강점기 때 문인처럼 말한다"고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이유는 또 뭘까. <농몽>은 투쟁현장과 방식에 대한 불쾌감과 반항, 혐오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학생운동이 종말을 맞이하고, 노동자도 운동가고 아닌 위치에 서있으면서 투쟁현장에 뛰어든 어떤 사람의, 다소 질척이는 자기고백이다. 

<메이•제주•데이> 휘린 2021

 1940년대 말,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25,000~30,0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지금, 당시 어린이였던 생존자들은 노인이 되었다. 영화는 이들의 증언을 기록한다. 생존자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을 통해 당시를 재현하고, 생존자의 모습과 함께 여전히 4.3 사건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해야 하는 현실이 등장한다. 70년 전의 사건에 대한 이미지 기록은 많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영화에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를 극영화로 재현하는 것에는 많은 윤리적 문제가 뒤따른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된 당시의 기록은, 학살을 경험한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본 당시의 기록을 그 무엇보다 생생하게 재현한다.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또는 애니다큐라 불리는 작업은 기록도 실사로의 재현도 쉽지 않은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고, 사건뿐 아니라 그것을 경험한 이의 기억과 감정 자체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실사 다큐멘터리와 차이를 갖는다. <메이•제주•데이>는 역사에 대한 접근법을 다양화하는 동시에 치열한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희생자의 넋을 기린다.

<산 23-1, X> 이민호 2021

 부산 남구 문현동 돌산마을은 원래 공동묘지였던 산비탈에 빈민들이 모여 무허가 건축물을 짓고 살아가던 산동네다. 영화의 제목은 이곳의 주소다. '산 23-1'이라는 주소명은 이곳이 주거지로 등록된 곳이 아님을 행정적으로 규정한다. 부산시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곳을 벽화마을로 지정하였지만, 이후 이곳은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다. 사람들은 떠나가고, 남은 사람들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인다. 빛 바랜 벽화 위에는 빈집이라는 의미의 붉은 X 표시가 그어진다. 영화는 사람들이 떠나간, 몇 사람과 고양이 몇 마리만이 남은 마을을 담아낸다. 아쉽게도, 영화는 그곳을 카메라에 담아내기만 할 뿐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그것 말고는 이곳에 대해 다룰 방식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철거되어가는 한 가운데 서 있다. 

<스틸 사이드> 미코 레베르자, 카롤리나 푸질리어 2021

 시요코이(Siyokoy)는 필리핀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위협적인 수중생물인 이들은 인간과 유사한 형상에 아가미, 녹색 피부, 물갈퀴, 비늘 등을 갖춘 것으로 묘사된다. <스틸 사이드>는 버려진 워터파크, 아쿠아리움, 동물원, 리조트에 대한 이야기다. 신자유주의의 광풍과 함께 개인 투자자들은 빚을 잔뜩 끌어 안고서 섬 하나를 통채로 테마파크로 만들어버렸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긴 지금, 폐허가 된 그곳은 인간 이후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바다와 연결된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인간이 떠난 섬이 하나의 거대한 바다포유류가 되어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이 버린 수족관과 수영장엔 물이 들어왔다 빠지길 반복하고, 작은 바다생명체들이 그곳을 새로운 집으로 삼아 살아간다. <스틸 사이드>는 인간과 인간이 데려온 생명체들이 사라진 이후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동물 형상의 조각상, 벽화를 담아낸다. 그것들은 움직이 않는 무생물이지만 인간-이후의 신화 속에서 인간이 떠난 자리를 살아가는 생명체로 여겨진다.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미코 레베르자는 이것들을 필리핀 신화 속 시요코이로 부르려 한다. 인간 이후엔 무엇이 살 것인가? 인간이 남긴 폐허의 흔적에서 살아갈 새로운 생명체를 인간과 유사한 형상의 바다생명체로 상상하는 것은 인간-문명의 반복을 떠올리는 것일까?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벌어진 자본주의적 재난의 폐허는 실패한 아메리칸 드림을 보여주며, 그것은 필리핀 이민자의 카메라를 경유해 인위적 사물들이 물, 바람, 식물 등 자연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종종 등장하는 안내방송은 인간 없는 세계에 울려퍼지는 인간이라는 폐허의 흔적으로 텅 빈 공간을 떠돈다.

<저스트 어 무브먼트> 빈센트 미슨 2021

 고다르의 영화 <중국여인>에 출연했던 오마르 블론딘 디옵은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떠난 유학생, 혁명가, 작가이다. 그는 68년 혁명에 참여한 이후 추방되어 27세에 세네갈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고다르의 영화에 자신으로 출연한 모습을 제외하면 그의 모습이 기록된 이미지는 거의 없다. 영화는 고다르의 영화를 비롯해 오마르에 대해 말하는 고다르와 얀 비아젬스키, 생존한 그의 가족과 동료 등을 통해 그의 생애를 쫓는다. 또한 <중국여인>을 보는 관중, <중국여인>에서 무술(인지 춤인지 모를 것)을 수행하는 이들처럼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들 등이 영화에 담긴다. 모자이크처럼 직조된 영화의 이미지들은 존재도, 기록도 부재하는 대상을 기록하기 위해 그 주변부를 맴돈다. 영화의 어떤 것도 그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실패한다. 대신 영화는 그의 행적이 만들어낸 궤적을 쫓는다. 68 즈음의 프랑스와 중국의 관계는 현재의 세네갈과 중국 활동가들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영화에 출연한 오마르의 형상은 세네갈의 현재 활동가들의 모습으로 계승된다. 영화는 오마르에 대한 조각들을 수집해 배열하지만 진실을 찾아내는 데 실패한 탐정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패한 추리는 무가치하지 않다. 영화-탐정이 실패한 것은 오마르 블론딘 디옵이라는 인물 자체를 담아내는 것이지, 그의 행적과 윤곽을 담아내는 것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피폭의 연대> 리티 판 2020

 3채널로 구성된 영상은 '피폭'이라는 제목의 단어가 말해주는 것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개의 핵폭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악(惡)의 성질에 대한 것이다. 방사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인해 흘러나온 방사능은 태평양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에서 피폭된 이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놓여있다. 낙진이라는 형태로 퍼져나가는 방사능은 그것의 확산을 막는 것도, 그것의 흔적을 지우는 것도 쉽지 않다. 리티 판은 악이 방사능처럼 사람들을 피폭시키는 성질의 것으로 파악한다. 방사능이 아닌 수단으로 발생한 여러 학살은 3채널의 영상 속에서 몽타주되고, 확산되는 피폭/악에 이미지로 존재한다. 영화 전체에 흐르는 피폭-비극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지만, 이는 관객의 스마트폰과 TV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폭-비극의 이미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피폭의 연대>는 이미 모든 곳에 가득한 피폭의 이미지를 다시금 스크린에 끌어오는 것에서 멈추는 대신, 그것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그러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악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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