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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17. 2021

잡탕의 참맛

<말리그넌트>제임스 완 2021

*스포일러 포함


 간호사인 매디슨(애나벨 윌리스)은 폭력적인 남편과 살고 있다. 몇 차례 유산을 겪은 그는 어느 날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머리에 부상을 당한다. 그날 밤, 정체불명의 존재가 부부의 집을 습격해 남편을 살해한다. 그날부터 매디슨은 자신을 공격했던 존재가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그 현장에 있는 것만 같은 생생한 환영을 보게 된다. 매디슨과 그의 동생 시드니(매디 해슨)는 살인사건들을 조사하던 형사 케코아(조지 영)와 레지나(마이콜 브리아나 화이트) 형사에게 매디슨의 상황을 알린다. 이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지만, 메이슨이 정체불명의 존재가 실은 자신의 어릴 적 상상의 친구 ‘가브리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상황이 급변한다. <분노의 질주: 더 세븐>과 <아쿠아맨>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경험한 제임스 완이 오랜만에 호러 장르로 복귀했다. 각본으로는 <컨저링> 시리즈에서 수녀로 출연했던 배우이자 제임스 완의 배우자 잉그리드 비수와 제임스 완이 함께 참여했다.

 <말리그넌트>의 포스터는 <컨저링>과 <인시디어스>와 유사한 점프스케어 가득한 오컬트/하우스 호러일 것이란 예측하게 한다. 하지만 이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간다. B급 크리처 영화 같은 오프닝 시퀀스가 지나면 제임스 완이 지난 10년 간 만들어온 <컨저링>, <인시디어스> 시리즈의 분위기를 잔뜩 풍기는 집이 등장한다. 매디슨의 남편이 살해당하는 장면까진 그가 오랜 시간 연출과 제작으로 선보여온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매디슨이 첫 환영을 보는 순간부터 영화의 장르가 바뀐다. 하우스 호러에서 슬래셔로 장르를 뒤바꾼 영화는 원색의 조명, 가죽장갑을 낀 연쇄살인마, 다소 티나는 고어 효과 등 지알로 호러들의 시각적인 외피를 가져온다. (여기서 이 영화를 ‘지알로 장르’라고 부르는 평은 틀렸다. 지알로 장르를 따른다기보단 그 껍데기만 적당히 가져온 80년대 할리우드 슬래셔 영화에 가깝다.) 가브리엘의 살인행각이 이어지던 중 케코아 형사가 그와 조우하는 순간 영화는 마지막으로 장르를 바꾼다. 이 순간부터 이 영화는 크리처 장르와 액션이 뒤섞인 장르가 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경찰서 액션 장면을 보면서 <레이드> 같은 정통 액션영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시드니가 폐쇄된 병원에 잠입하는 장면과 케코아가 가브리엘을 추적하는 장면은 QTE나 횡스크롤 형식의 호러/액션 게임들을 떠올리는 숏을 선보이기도 한다.

 사실 제임스 완이 이러한 방식의 장르 전환을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아쿠아맨>을 떠올려보자.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영화처럼 시작한 영화는 디즈니의 <아틀란티스> 같은 SF 판타지 어드벤처로 향했다가 마이클 베이 풍의 액션을 거쳐 러브크래프트 풍의 호러로 향했다가 <반지의 제왕> 같은 대규모 백병전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말리그넌트>의 구성은 제임스 완이 대자본을 들고 시도했던 것을, 그의 전문인 호러의 영역에서 시도한 것에 가깝다. <말리그넌트>는 제임스 완의 이름과 포스터가 주는 분위기를 보고 그의 지난 10년을 떠올렸을 관객들에게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제임스 완은 그간 <컨저링> 유니버스의 작품들에서 소위 ‘퇴마 액션’이라 조롱받았던 부분은 놀라운 액션 안무와 촬영을 보여주는 경찰서 장면으로 되돌려주며, 두 시리즈를 통해 생산된 10여 편의 영화가 보여준 지겨운 반복을 보기 좋게 끊어낸다. 

 물론 <말리그넌트>가 뛰어난 영화라거나 호러영화의 명예의 전당 같은 것에 오를 영화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말리그넌트>가 지향하는 것은 80년대 할리우드에서 쏟아져 나오던 ‘트래시 호러’에 가깝다. 개연성을 따지는 관객들은 이 영화에 쌍욕을 날릴 것이다. 제임스 완의 출세작인 <쏘우>보다 뻔하게 반전 요소에 대한 힌트를 영화 곳곳에 흘리고 있다. 가브리엘이 매디슨에 몸에 기생하던 쌍둥이 형제였으며 그의 일부가 뇌에 잠들어 있다 깨어났다는 반전은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매디슨과 시드니의 이야기는 대사를 통해서 순식간에 전개되곤 하며, 메디슨이 가브리엘을 몰아내고 자신의 몸을 되찾는 장면은 급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말리그넌트>를 즐기는 데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다소 난장판처럼 느껴지는 영화의 전환점들을 개연성이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장르들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쾌감을 온전히 즐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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