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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24. 2021

피해를 감각하기?

<보이스> 김곡, 김선 2021

*스포일러 포함


 형사를 그만두고 공사장 반장으로 일하는 서준(변요한)은 착실히 돈을 모아 경기도의 아파트를 구입하려 한다. 어느 날, 서준의 아내는 공사장에서 사고가 벌어졌다는 전화를 받고 합의금을 빠르게 입금할 것을 요구받는다. 돈을 입금한 직후 그것이 보이스피싱인 것을 알게 되지만, 입금한 7천만 원은 이미 사라졌다. 서준은 자신을 비롯해 공사장에서 일하던 이들 모두가 보이스피싱을 당해 총 30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해커 깡칠(이주영)의 도움을 받아 보이스피싱 콜센터가 위치한 중국 선양으로 떠난다. 중국에 도착한 서준은 곽 프로(김무열)와 천 본부장(박명훈)이 이끄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잠입해 돈을 되찾으려 한다. 한편 보이스피싱 조직을 쫓아오던 경찰 규호(김희원) 또한 서준이 남긴 단서들을 쫓기 시작한다. 옴니버스 영화 <무서운 이야기>와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 등 호러영화들을 통해 상업영화계에 진출한 김곡, 김선 감독의 신작 <보이스>는 추석을 겨냥한 전형적인 범죄영화의 틀을 취하고 있다. 현실의 범죄를 본떠 만들어낸 범죄조직이 짜 놓은 판에 (전직) 경찰이 뛰어들고, 좌충우돌 끝에 그것을 해결한다. 영화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이 매년 급증하고 있음을 알리는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는 보이스피싱의 위험성과 함께 피해자들에게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경찰 규호의 모습으로 끝난다.

 <보이스>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작동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곽 프로를 비롯한 기획실이 취준생, 건설노동자, 아파트 분양 신청자 등 다양한 타겟에 맞춰 대본을 쓰면, 콜센터의 직원들이 대본에 맞춰 전화를 돌린다. 이들의 전화번호는 ‘변작기’를 통해 추적하기 어려운 형태로 변형된다. 이들은 피해자들의 절박함과 공포감을 자극해 대본에 공감시킨 뒤 돈을 입금하도록 유도한다. 입금된 돈은 그 즉시 인출되고, 환전소에서 돈세탁을 거친다. 여러 단계를 거쳐 현금으로 인출된 돈은 조직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서준은 이 과정을 역으로 쫓는다. 한국에서 돈세탁과 변작기를 담당하는 박 실장(최병모)을 통해 선양으로 향해야 함을 알아내고, 선양에 도착해서는 곽 프로의 눈에 띄어 기획실에 들어가려 한다. 그의 역추적 과정은 빠르게,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109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은 서준을 따라 보이스피싱 조직의 작동과정을 쫓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흘러간다. 그렇다고 <보이스>가 몰입감이 뛰어난 액션으로 가득하다던가, 치밀한 편집으로 관객들을 홀리는 방식의 작품도 아니다. 빠른 편집은 리듬감 대신 오로지 속도감을 만들어내며, 카메라는 그것을 배가시키려는 듯 끊임없이 움직인다. 서준이 공사장의 현장소장(손정학)과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단순한 숏-리버스 숏 구도의 대화 장면임에도 카메라는 계속 인물을 향해 움직인다. 

 이 영화의 액션은 서준이 범죄조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카체이싱이나 몸싸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곽 프로가 취준생을 대상으로 쓴 대본을 직원들에게 브리핑하는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 곽 프로는 ‘말빨’로 수강생들을 현혹시키는 인터넷 강사이자, 10%의 팩트와 90%의 끼워 맞추기로 시청자를 끌어모으는 사이버렉카 유튜버이며,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타트업 대표다. 대부분이 ‘말’로 진행되는 보이스피싱이기에, 영화는 몇 차례의 전화와 서로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 콜센터 직원들의 모습을 마치 금고를 터는 하이스트 영화의 작전 장면처럼 보여준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카메라, 빠르게 교차되는 피해자와 사기꾼들의 이미지는 리듬감을 지닌 숏들의 몽타주 대신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영화 중반에 경찰이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해 브리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경찰은 보이스피싱 조직의 작동방식이 그려진 PPT를 스크린에 띄우고 설명을 이어가지만, 피해자들은 그 수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조직의 작동방식이 복잡할뿐더러, 피해자들의 절박함은 그것을 이해할 시간적, 심적 여유를 초과해버린다. 

 곽 프로는 보이스피싱 사기를 위해 필요한 것은 피해자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를 공감하는 것이라 역설한다. 여기서의 ‘감’은 감정이라기보단 감각에 가깝다. 어떤 감각일까? 취업, 입시, 아파트 분양, 수술비, 범죄 피해, 사고 등 분야를 막론하고 갖게 되는 돈에 대한 절박함 혹은 공포감. 이는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다. <보이스>를 잘 만든 범죄영화라고 할 생각은 없다. 서준, 곽 프로, 천 본부장 등의 인물은 그간 수많은 범죄영화에서 보아온 인물들의 전형성을 쫓는다. 하지만 <보이스>는 지점은 이들의 사연을 서사에서 탈각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관객은 서준이나 곽 프로, 혹은 돈을 위해 콜센터에 자원한 다른 이들이나 수많은 피해자들에 몰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몰입의 여지를 지워내고 극의 모든 인물을 객체로 만든다. 서사의 객체들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관객은 서준의 동선에 따라, 경찰이 피해자들에게 이해시키려 했던 보이스피싱 조직의 작동방식이 담긴 그림을 마주할 뿐이다. 영화는 자신의 목적이 거칠게 그려진 이 그림을 관객의 머리에 각인시키는 것뿐 것 것처럼 내달린다. 그 끝에서 사건을 담당한 형사 구호가 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유튜브였다면 너무나도 스킵 배너를 누르고 싶어지는 구도의 공익광고처럼 다가오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꽤나 논리적인 결론이다. <보이스>는 교훈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수의 관객들이 이 영화를 “공익광고스럽다”고 평가한다. 이 간극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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