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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24. 2021

8할의 계승과 2할의 실패

<캔디맨> 니아 다코스타 2021

*스포일러 포함


 슬럼프를 겪는 미술작가 안소니(야히아 압둘 마틴 2세)는 큐레이터이자 애인인 브리아나(테요나 패리스)의 오빠 트로이(네이선 스튜어트 자렛)에게 자신이 새로 이사 온 지역의 과거를 듣게 된다. 90년대 빈곤한 흑인들의 주거 프로젝트가 있던 ‘카브리니 그린’에서 헬렌 라일이라는 백인 여성이 사람들을 살해하고 아기를 납치했던 사건이 있었다는 것. 지금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구역이 된 카브리니 그린을 찾아간 안소니는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앤드류(콜맨 도밍고)로부터 당시의 사건은 헬렌이 아닌 캔디맨(토니 토드)이라는 도시전설 속 존재의 소행이었음을 알게 된다. 캔디맨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안소니는 그를 주제로 작품을 만든다. 전시회 첫날, 브리아나의 동료 아트 딜러가 안소니의 작품 앞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그 이후로 안소니는 캔디맨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고, 캔디맨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1992년 버나드 로즈의 <캔디맨>을 잇는 작품으로, <겟 아웃>과 <어스>의 조던 필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했고, <두 여자>라는 독특한 여성주의 서부극을 연출했던 니아 다코스타가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2021년 버전의 <캔디맨>은 당연하게도 90년대에 제작된 2편과 3편의 내용을 배제한 채 진행된다. 블룸하우스의 <할로윈>이 그러했듯, 오리지널의 진정한 속편을 내세움과 동시에 동시대적 의제들을 작품에 녹여내려는 시도가 이 작품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할로윈>이 3대에 걸친 세 모녀의 연대와 생존을 그려낸다면, <캔디맨>은 2016년부터 이어진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더 나아가 흑인에 대한 린치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던 19세기 후반부터 이어지는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다. 92년의 <캔디맨>은 박사과정 중인 백인 여성이 흑인 빈민가에서 시작된 도시괴담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2021년의 <캔디맨>에서 앤드류는 캔디맨이 단독자가 아닌 벌집과 같은 존재라 언급한다. 캔디맨은 19세기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인종차별로 인해 살해된 흑인 남성들의 군집이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계급인 백인 여성 헬렌 라일이 여기에 온전히 접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92년도 <캔디맨>에서는 헬렌만이 캔디맨의 존재를 목격하며, 캔디맨이 저지른 살인행각은 헬렌의 것으로 오인된다. 흑인 빈민가에서 출발한 괴담은 백인 대학생들에겐 단순한 도시괴담으로 소비되지만, 그것을 민속지적인 연구의 입구로 활용하려는 순간 백인 연구자는 별종이 된다. 

 물론 이는 흑인 남성인 안소니가 캔디맨에 접근할 때도 유사하게 다뤄진다. 캔디맨 도시괴담을 진실로 믿는 안소니는 (당연하게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안소니 본인도 전시장에서 살인이 벌어지기 전까지 이를 믿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시장에서의 살인사건 이후 광인 취급을 받는 것은 자연인 안소니가 아니라 미술작가 안소니다. 사건 이전의 안소니는, 역시나 사건 이전엔 그의 작업을 젠트리피케이션의 주범인 한량 힙스터 예술가들의 클리셰 덩어리로 바라보던 평론가의 말 그대로의 인물로 다뤄진다. 트로이는 안소니에게 “아령 내려놓고 붓이나 들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사건 이후, 즉 캔디맨이 활동을 재개한 이후의 안소니는 작가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작업은 처음부터 흑인들을 한 구역이 밀어 넣고 빈민가를 형성하게끔 유도된 도시계획, 소수자성을 내세운 힙스터 예술가들이 아니라 백인/자본 주도로 벌어진 흑인 빈민들을 몰아낸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통렬한 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캔디맨이 육체가 존재하는 살인마임과 동시에 거울 속을 보며 캔디맨을 다섯 번 불러야 소환되는 영적 존재라는 이중성을 갖는 것처럼, 안소니는 비슷한 주제를 다뤘음에도 주목받지 못하던 슬럼프에 빠진 작가에서 살인사건을 통해 관심을 얻게 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흥미로운 발언이 되는 예비 스타 작가가 된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야 등장하는 캔디맨처럼, 안소니는 누군가 그에게 주목하고 찾아주었을 때가 되어야 (백인 평론가에 의해) 발언권을 얻는 흑인 남성이다.

 니아 다코스타의 <캔디맨>은 92년도 작품의 테마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캔디맨이라는 도시괴담의 연원을 더욱 깊숙이 탐구하고, 지난 150여 년 동안 미국에서 벌어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혐오범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주인공을 백인에서 흑인으로 옮김으로써, 다시 말해 캔디맨과 자신을 동일화할 수 있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가능하다. 하지만 안소니가 실은 92년도에 헬렌(과 캔디맨)에게 납치되었던 어린 아기였다는 반전이 드러나고, 안소니와 캔디맨의 동기화가 진행되는 후반부는 다소 당황스럽다. 캔디맨과 안소니, 헬렌의 이야기를 엮기 위한 선택이라기엔, 영화가 앞서 만들어낸 쟁점들을 와해하기 때문이다. 안소니의 이야기는 과거와 연결된 어떤 특별한 존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시카고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의 이야기로 설정되었어야 한다. 영화는 자신이 던진 쟁점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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