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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26. 2021

우정을 지속하는 카메라

<종착역> 권민표, 서한솔 2020

 새로운 학교에 전학 온 중학생 시연(설시연)은 사진부에 들어간다. 시연은 그곳에서 만난 소정(박소정), 송희(한송희), 연우(배연우)와 금세 친해진다. 어느덧 함께 맞는 첫 여름방학, 사진부 담당 선생님은 네 친구에게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건네주며 창소년을 위한 사진 공모전에 낼 사진을 찍어올 것을 숙제로 내준다. 공모전의 주제는 “세상의 끝”, 네 친구는 세상의 끝을 찍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한다. 귀가 중 지하철 노선도에 적힌 수도권 1호선 종착역 ‘신창’역을 발견한 시연은 그곳에 갈 것을 친구들에게 제안한다. 네 친구는 세상의 끝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신창역으로 향한다. <종착역>은 전학생, 여름, 방학숙제, 기차여행 등 익숙한 청소년 성장영화의 키워드들을 듬뿍 함유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전형적인 성장영화의 길을 가지 않는다. 얼떨결에 1박 2일의 여정이 되어버린 네 친구의 여름방학 여행을 담은 이 영화는 방학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행을 택한 네 친구의 발걸음에 조용히 동참할 뿐이다.

 영화에서 종종 여행 중 네 친구가 촬영한 사진들이 등장한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는 모습부터 텅 빈 지하철 플랫폼, 천안행 열차를 타버려 도착하게 된 천안역, 마침내 도착한 (구)신창역의 버려진 역사 내부,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기 위해 이동하다 만난 고양이, 쏟아지는 비가 만들어낸 진흙에 찍힌 발자국, 비와 어둠을 피하기 위해 들른 마을회관에서 맞이한 새벽 풍경. 이들의 사진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망한’ 사진이다. 손가락이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다거나, 초점이 나갔다거나,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아 어둡게 나왔다거나.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나간 상황에서 이들이 자신의 여행을 증명할 방법은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여행 중 만난 존재들을 찍는 것뿐이다. 현대화된 신식 신창역 역사에 실망하고, 주변에 논 뿐인 (구)신창역 역사에 허무함을 느끼던 이들에게 “세상의 끝”을 찍어오라는 숙제의 목표는 어느새 사라진다. 지하철로 되돌아갈 택시비조차 없는 중학생들에겐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은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는 시골이지만, “갑자기 땅이 뚝 끊긴” 세상의 끝이란 없음을 새삼 깨닫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들은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세상의 끝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별 다른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를 제외하면 다른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시골에서 맞이한 밤의 어두움은 이들의 이동을 막을 뿐이지, 영화 속에서 어떤 공포의 장치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세상의 끝이라 여기던 시골마을은 이들을 맞이해주려는 듯 텅 빈 마을회관을 제공해준다. 네 친구가 자신의 가족, 시골집, 추억담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내는 동안 어둠은 물러가고 새벽빛이 찾아온다. 이 과정에서 성장이라 할만한 것은 없다. 아이들은 여기서 어떤 인격적, 교양적 성장을 얻지 않는다. 그럴 만한 사건도, 갈등도, 고난도 영화엔 등장하지 않는다. <종착역>은 성장보단 우정이 쌓여가는 과정, 함께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맞이하는 시간, 새로운 공간을 함께 찾아가는 것의 희열을 담아낸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 초반 서로의 눈에 콘택트렌즈를 끼워주며 장난치던 모습과 영화 후반부에서의 모습은 전혀 다르지 않다. <종착역>을 공동연출한 권민표와 서한솔 감독은 배우들에게 별다른 대사 없이 상황만을 정해주고 자유롭게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때문에 종종 <종착역>은 중학생 청소년의 여름방학을 뒤쫓는 시네마 베리떼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우정을 찍는 카메라. 각자 스마트폰 대신 쥐고 있는 필름 카메라 속 사진들은 이들의 방학이 끝난 뒤에야 현상될 것이다. 우정은 함께한 시간을 뒤늦게 기억하는 것에서 지속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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