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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7. 2017

6.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영화도 잘 본다

 매 연말마다 친구들과 하는 짓이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 혹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1편부터 마지막까지 정주행 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났을 때부터 거의 매년 거르지 않고 해오는 연례행사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 정말 길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아동용 영화에 가까운 <마법사의 돌>과 <비밀의 방>부터 각각 152분과 162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죽음의 성물 2부>까지 8편의 러닝타임을 전부 합치면 1,178분, 19시간 38분이라는 압도적인 러닝타임이 나온다. 영화당 평균 147분이라는 이야기다. <반지의 제왕>은 편수가 적어서 그렇지, 한 편당 러닝타임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나 확장판으로 관람했을 때 러닝타임은 관객을 객석과 물아일체의 상태로 만들려는 의도가 다분한 수준이다. 각 편마다 4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데, 3편의 총 러닝타임은 726분, 12시간 6분을 기록한다. 한 영화당 평균 242분의 러닝타임이다. 여기에 같은 세계관의 영화인 <호빗> 트릴로지의 러닝타임을 더하면 1,200분, 20시간의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집에서 정주행 하기에도 벅찬 시간이다. 

 최근 극장에서 만나게 되는 영화들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상업영화 100분의 법칙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180분 러닝타임의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올해 최고 화제작인 <곡성>과 <아가씨>의 러닝타임은 156분과 144분(확장판 167분)으로 절대 짧지 않다. 할리우드로 넘어가도 151분의 <배트맨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147분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143분의 <엑스맨: 아포칼립스> 등 슈퍼히어로 영화를 필두로 러닝타임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 추세다. 영화들 이불 필요하게 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요즘, 극장에서 2시간 반을 앉아있는 것은 기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엉덩이 가무 거운 사람이 영화도 더 잘 보게 되었다.

처음으로 인터미션을 경험한 영화 <킹콩>

 생각해 보니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가 <마법사의 돌>이었다. 152분의 러닝타임을 버틴 초등학교 1학년의 내가 대견해지는 한편, 내가 본 긴 영화들에 뭐가 있었는지 떠올려보게 됐다. 처음으로 극장에 앉아 3시간을 보냈던 것은 피터 잭슨의 <킹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5년 개봉 당시 아빠와 둘이 서울극장에서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총 186분의 기나긴 러닝타임 동안 졸았는지, 즐겁게 봤는지, 징그러운 스컬 아일랜드의 벌레들을 보며 벌벌 떨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제일 신기했던 것은 영화 중간에 인터미션을 줬다는 것이다. 오래된 기억이라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 중간에 상영을 멈추고 극장에 불이 켜진 뒤 관객들이 화장실을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물론 방광이 충분히 자라지 못했던 초등학교 4학년의 나 역시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었다. <킹콩>은 고전 서사영화처럼 영화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는 영화가 아님에도 인터미션을 줬었다. 처음으로 겪어 본 영화 상영 중의 인터미션이었다. 이후 극장에서 윌리엄 와일더의 <벤허>를 관람할 때 인터미션을 경험했다. 영화 중간에 인터미션이라는 문구가 삽입되어있는 것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222분의 러닝타임이라 당연한 것이었지만, 뮤지컬이 아닌 영화관 스크린에 안내문구가 뜨고 10분의 인터미션을 갖고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좌석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재의 관객들에게는 생경한 경험이다. 

인터미션 없이 226분을 관람한 라브 디아즈의 <떠나간 여인>

 지난 2016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라브 디아즈 감독의 <떠나간 여인>을 극장에서 관람한 일이다. 부려 226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이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없고, 대부분이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흑백영화였다. 지금까지 관람한 긴 러닝타임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스크린을 넘어 장시간 동안 좌석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영화적 체험이 되는 영화였다. 심지어 인터미션조차 없었다. 라브 디아즈 감독이 직접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들에 인터미션을 넣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4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좌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잠들지 않으면 영화를 목격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관객을 몰아넣는 영화였다. 심지어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같은 감독의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는 489분, 8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영화다. 엉덩이가 무거운 씨네필들을 위한 감독이 아닐까?

 극장에 장시간 앉아있게 되는 것은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볼 때만 있는 일이 아니다..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종종해주는 메가박스 무비올나잇, 운 좋게 CGVVVIP를 달성해 받았던 원데이 프리패스 관람권으로 5편의 영화를 몰아봤던 날, 심야영화를 합쳐 총 6편의 영화를 달렸던 부천영화제의 어느 날, 매번 그렇지만 하루에 3편은 기본으로 보게 되는 각종 영화제들 등극장에서도 여러 편의 영화를 연이어 달리게 된다. 집에서 거리가 꽤 되는 상암동 영상자료원에 가게 되는 날이면 오며 가며 쓴 시간이 아까워 두 세편씩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 사실, 굳이 멀리 있는 영상자료원이나 영화제가 아니더라고 한 번 외출했을 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러 편의 영화를 관람하려는 편이다. 영화 한 편 보러 여러 차례 외출하는 것도 귀찮고, 여러 개봉작에 시사회, 각종 영화제와 기획전 등을 포함하면 극장에서 볼 영화는 넘쳐흐른다. 


 연초부터 극장을 찾을 일로 가득하다. 영상자료원에서는 연말부터 이어진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상영이 계속되고 있고, 아카데미 시즌을 맞은 극장가엔 영화들이 넘쳐난다.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는 연례행사 중 하나인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시간표가 곧 공개될 예정이다. 나에게 있어 미지의 영화들을 계속해서 알려주는 시네마테크와 기대작이 끊이지 않는 극장가 덕분에 올해도 엉덩이를 무겁게 유지해야 할 것 같다. 장시간 착석을 위해 허리 건강의 유지도 필수다. 올해는 어떤 기다란 영화들이 있을지, 어떤 영화제가 나를 극장에 붙잡아 둘지 벌써부터 달력을 펼쳐 스케줄을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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